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2> 외국 사신의 진상품 강황(薑黃)

유구(琉球) 국왕의 둘째 아들 하통련(賀通連)이 사람을 보내어 좌, 우의정에게 편지와 선물을 바쳤다. 선물은 단목(丹木) 5백 근, 백반(白磻) 5백 근, 금란(金?) 1단, 단자(段子) 1단, 청자기(靑磁器) 열 가지, 심황(深黃) 50근, 천궁(川芎) 50근,  곽향(藿香) 50근, 청자화병(靑磁花甁) 하나, 침향(沈香) 5근이다.

- 『세종실록』 즉위년(1418) 8월 14일

유구국(流球國)은 현재 일본 가고시마 남쪽의 오키나와현에 있던 왕국이다. ‘류큐국’으로 불리는 이 나라는 동남아, 중국, 일본 등과의 중계 무역을 통해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609년에는 현재 가고시마 일대에 존재했던 ‘사쓰마 번(薩摩藩)’의 침공을 받았고, 1879년에는 일본에 침략을 받아 강제 병합되었다.

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와 교류해 왔던 유구국은 조선이 건국되자 일찍이 사신을 보냈다. 『태조실록』에는 1392년 8월 18일 ‘유구국의 중산왕(中山王)이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9월 11일 사신이 문반 5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고 조회에 참석하여 방물을 바쳤다. 그해 윤12월 28일과 1400년 10월 15일에도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는 스스로를 신하로 칭하며 예물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1409년 9월 21일에는 찰도를 이어 왕이 된 사소(思紹)가 조선에서 여러 차례 보내준 선물에 대해 감사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한편 유구국에서는 몇 차례 왜구에 의해 노예가 된 조선인을 송환했다. 태종은 왜구에게 포로가 되어 유구국으로 팔려간 백성들의 쇄환(刷還)을 위해 1416년 1월 27일 이예(李藝:1373~ 1445)를 사신으로 보내 44명을 귀국시키기도 하였다.

세종 즉위년인 1418년 8월 14일 유구국에서 예물을 바쳤다. 2년 전 이예가 유구국을 방문해 많은 선물을 준 답례 의미였다. 예물은 활을 만드는 재료인 단목, 공예 직물인 금란, 화려한 도자기, 고급스러운 향이 나는 침향 등 사치품이었다. 그리고 약재인 심황(深黃), 천궁(川芎), 곽향(藿香)도 있었다.

이 약재 중 주목되는 건 심황(深黃)이다. 인도 남부가 원산지인 심황은 당시 주로 염료, 양념, 흥분제, 향신료, 화장품으로 활용되었다. 약용으로는 뿌리줄기가 이용되었는데 성질은 약간 쓰면서도 화끈거린다.

심황은 종종 울금(鬱金)이나 생강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실학자 홍만선(洪萬選:1643∼1715)은 자신의 저서인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한자 ‘울금(鬱金)’ 옆에 한글로 ‘심황’이라고 표기하기도 하였고, 실학자 이수광(李?光:1563~1629)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중국의 『본초도경(本草圖經)』을 인용하며 ‘강황(薑黃)은 3년 이상 묵은 생강’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강황(심황)은 울금도 아니고, 생강도 아니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중략)...
제사 지내는 일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어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평상시에 공급하는 대수롭지 않은 제수(祭需)도 대용(代用)하는 것이 미안한데, 더구나 신명(神明)을 처음 모시는 울창주(鬱?酒)이겠습니까. 지난해 해사(該司)에서 울금(鬱金)이 부족하여 해조(該曹)에 보고하였더니, 해조에서는 심황(深黃)으로 대용하라고 제용감(濟用監)에게 감결(甘結)을 받게까지 하였습니다. 따라서 애당초의 잘못은 전적으로 해조에 있습니다. 중대한 제향(祭享)의 일을 구차하고 소략하게 하였으니, 제사에 대해 불경(不敬)한 죄가 큽니다. 그 당시 해조의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파직하도록 하소서.

- 『선조실록』 158권, 선조 36년(1603) 1월 3일 -

선조 36년(1603) 1월 3일 당상관과 낭청이 파직된다. 이유는 왕실 제향 때 쓰는 울창주의 원료를 울금에서 심황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이처럼 울금과 심황은 다른 것이다. 생강과도 모양만 비슷할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심황은 아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강황으로 여겨진다. 생강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 강황은 소염, 항암, 항산화 효과가 있다. 고지혈증과 심혈관 질환 예방, 체지방 분해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어혈, 혈종, 종기를 삭이는 데 활용한다.

『동의보감』에서는 강황을 “성질은 뜨겁고(熱), 맵고(辛), 쓰다(苦). 효능은 울금보다 강하다. 혈괴(血塊), 옹종(癰腫)에 주로 쓴다. 월경을 통하게 하고 넘어지거나 맞아서 멍든 것을 풀어주며, 냉사와 풍사를 제거하고, 기창(氣脹)을 삭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해남(海南)에서 나는 것이 봉출, 강남(江南)에서 나는 것은 강황이다.”라고 하였는데, 『동의보감』은 명나라 이시진(李時珍:1518~1593)이 지은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인용했다. 따라서 ‘강남’이나 ‘해남’은 중국 남부지역을 말한다. 강황은 수천 년 전부터 인도 등 남아시아에서 전통의학, 염료, 향신료 재료로 쓰이다가 동아시아에서는 한약재로 활용됐다.

한편, 강황의 노란색 때문에 조선이 고민에 빠진 적도 있다. 옛사람들은 색에 의미를 부여했다. 검은색인 현(玄)은 하늘을 뜻하고, 노란색인 황(黃)은 땅을 뜻했다. 그래서 황제의 평상복은 황색과 자색(紫色)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백성은 황제의 색깔인 현, 적, 자색에 신경을 써야 했다. 조선도 중국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해 노란색인 황색의 사용을 자제했다. 세종은 27년 8월 6일 복식에 관한 사안에 대해 의정부에 전지(傳旨)하며 “현(玄)은 하늘빛이기 때문에 가장 높고. 황제의 평상복은 황색이다. 황(黃)은 땅 빛이기 때문에 신하 된 자는 입지 못한다.”라고 했다.

태종 17년 5월 20일, 일본 사신이 강황인 심황(深黃)을 바친 일이 있었는데 외교를 담당한 예조는 선물 수령 여부를 고민한다. 정치적으로 확대해석하면 민감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에 결국 태종은 일본의 강황 선물을 받지 않았다.

예조에서 왜사의 심황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청하니 황색의 사용을 금한 때문이라

-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5월 20일 -

이에 비해 세종은 유구국의 강황 예물을 받았다. 중국과의 관계가 아닌 유구국의 성의만 생각했다. 또 답례품도 충분하게 보냈다. 강황은 일본이나 유구에서 조선의 임금에게 바칠 정도로 소중한 약재였다.

강황의 잎은 파초 잎과 비슷한데 (薑黃葉似芭蕉葉)
단비가 뿌리를 적셔 잎이 조금 펴졌네. (好雨流根葉微伸)
말하노니, 소년들은 유심히 살펴보라. (寄語少年須着眼)
하늘은 사람과 사물을 똑같이 사랑한다오. (天於人物本同仁)

- 조경(趙絅, 1586~1669) 『용주유고(龍洲遺稿)』 「강황을 새로 심다(新種薑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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