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1

전농동 터줏대감,
3대째 내려온 중식의 대가

왕기명 신락원 대표

한자로 흘겨 쓴 붉은 간판, 그 아래로 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국풍의 붉은 소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주방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중국어까지 동대문구 전농동에 자리잡은 ‘신락원(新樂苑)’은 1965년부터 무려 3대째 내려온 소문난 중화요리 전문점이다. 열기로 가득한 주방, 풍채 좋은 주방장이 묵직한 웍을 능숙하게 다루더니 유산슬과 깐쇼새우 한 접시를 뚝딱 차려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군 신락원을 6년 전부터 이끌고 있는 왕기명 셰프의 주특기다. 주방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던 그가 요리를 앞에 두고는 ‘식기 전에 맛을 봐야 한다’며 마음을 졸인다.

“손님들에게 최선의 맛을 전하는 게 주방장의 역할이거든요. 그래서 배달 주문도 망설이고 있어요. 어떤 상태로 배달이 될지, 배달 중에 맛이 얼마나 변할지 예측하기 힘들잖아요. 아직까지는 갓 완성된 요리를 홀에 계신 손님들께 최선의 맛으로 선보이고 싶습니다.”

그의 고집스러움에 높아진 기대는 음식을 맛보는 순간 확신으로 굳어진다. 맛에 있어서는 쉽게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걸어온 길. 이는 1대 왕세안, 2대 왕수신 주방장이 다져온 기본기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요리를 어깨너머로 배우던 12살 소년은 30년 동안 국내 정상급 호텔에서 최고의 중식 요리사로 활약하다 50대가 되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군 신락원으로 돌아왔다. 요리를 향한 열정과 자부심은 그대로 이어가고, 호텔식 메뉴로 변화를 준 왕기명 주방장의 신락원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신락원은 3대가 이어온 중화요리 전문점입니다. 할아버지의 창업 스토리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가 궁금합니다.

‘왕’이라는 성씨에서 짐작할 수 있듯 화교 출신입니다. 아버지가 19살에 한국에 오셨는데 당시 규제가 심해 화교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고 해요. 그나마 가능한 업종이 식당이라 할아버지께서 중화요리 전문점을 열었지요. 처음에는 지금의 이 자리에 ‘안락장’이라는 상호로 출발했고요. 이후 1979년, 아버지가 뚝섬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다 이곳으로 오시면서 ‘신락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저도 외부에서 경력을 쌓고 신락원으로 돌아온 지 6년째입니다. 저나 아버지 모두 부친의 식당을 그대로 물려받는 게 아니라 밖에서 충분한 경력을 쌓은 뒤 가업을 잇는 방식으로 신락원을 57년 동안 지켜왔습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버지의 음식 솜씨가 좋았거든요. 그 음식들을 매일 먹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식의 기준이 높아졌습니다. 좋은 음식, 맛있는 음식, 정성을 쏟은 음식의 기준을 높여준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죠. 아버지가 평소 입버릇처럼 강조하신 기본은 ‘신용’과 ‘정성’이에요. 음식은 재료부터 조리과정까지 믿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방 안에서는 정성을 다해 조리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리 특별한 말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요리사로서의 기준점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3대째 가업을 잇기가 쉽지 않은데요. 대를 이어 중식 요리사의 길을 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배달 심부름을 시작해 가게 일을 도왔거든요. 성인이 되어 진로를 결정할 때,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 보니 역시나 중화요리더라고요. 화교 출신 요리사는 호텔 중식당에 최우선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에 일단 경험을 넓히기로 했습니다. 중식의 매력은 강한 화력에서 순식간에 조리하는 것인데요. 그 화끈함에 끌리기도 했고요.

선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전통이 있을까요? 또한 왕기명 세프가 이끄는 신락원만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신락원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고유 메뉴 ‘신락면’이 있습니다. 매콤한 볶음면으로 지금으로 치면 볶음짬뽕과 비슷한데요. 1980년대에 처음 선보였으니 당시만 해도 독창적인 신메뉴였지요. 사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일반적인 중국음식점을 운영하셨는데요. 저는 호텔식 중국요리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호텔에 납품하는 고급 식자재를 쓰고, 꽃빵과 단무지를 빼고는 모두 직접 만들이지요. 푸딩 디저트도 별미입니다. 연유, 우유, 두유로만 만든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입니다.

30년 동안 서울 플라자 호텔, 조선호텔 호경전, 아워홈 싱카이, 세종호텔 황궁, 대통령 중식 담당 조리사 등 그 경력이 화려합니다. 다양한 경험이 신락원을 운영하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 밑에서만 배웠다면 발전하지 못하고 옛날식만 고수하게 되었겠죠. 나름 경력이 있었지만 호텔에 입사해서 처음 3개월은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한두 가지 일을 시켜보니 제법 잘 해내서 3개월부터 튀김을 담당했습니다. 상당히 빨리 불을 만지게 된 사례였지요. 호텔 중식당은 끊임없이 발전해야 하는 곳입니다. 다른 주방장을 보고도 배우고, 해외 연수를 통해 자극도 받고, 주기적인 경연을 통해 새로운 메뉴에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시각이 넓어진 게 가장 큰 배움이었지요. 원가 관리, 식자재 관리, 매장 관리의 기본기를 체계적으로 쌓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방 청소 역시 매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오븐 클리너로 기름때를 말끔하게 닦습니다. 이만큼 관리하는 주방은 동네 중국집에서 우리집 밖에 없을 걸요.

가장 자신있는 요리, 인기있는 요리는 무엇인가요?

칠리새우, 크림새우, 깐풍기, 탕수육은 이미 외부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메뉴입니다. 아워홈에서 근무 당시 뷔페식 메뉴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했는데요. 전 구성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1~4등까지를 독차지한 메뉴거든요. 여기에 더해 양장피와 유산슬도 인기가 좋습니다. 누룽지탕의 경우 대기업 마트와 제품 출시를 논의중입니다. 맛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다면 고객과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단, 질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신중해야겠지요.

꼭 지키고자 하는 요리 철학이 있을까요?

기본을 중시합니다. 중식의 기본은 파, 마늘, 생강을 볶아 향을 내는 것인데요. 이를 생략하고 넘어가는 법은 없습니다. 혹 불 조절을 잘못하여 너무 센 화력에서 볶아지면 버리고 다시 향을 낼 정도에요. 누가 알아주는 과정은 아니지만 미묘하게 맛을 좌우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

호텔급 요리를 선보이는 신락원은 평범한 골목에 자리잡은 숨은 고수의 느낌이 강합니다. 고객들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우리 동네에 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종종 들어요. 호텔에서 먹는 중식 요리 못지않다는 칭찬도 감사하고요. 동네 손님뿐 아니라 멀리서 찾아주는 분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모습에 보람을 느낍니다. 오래된 가게라 전용 주차장이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인데요. 힘든 걸음을 해주신 만큼 맛있는 요리로 보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호텔에서 일하는 것과 자신만의 가게를 꾸리는 일은 차이가 클 것 같은데요. 창업을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무엇보다 자신이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리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 줄 알아야 위기가 닥쳐도 버티는 힘이 생기거든요. 특히 중식의 경우 주방장만 잘 쓰면 된다고 생각하고 덜컥 창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주방장은 요리만 담당할 뿐 인력 관리, 원가 관리까지 꼼꼼하게 챙기지 못합니다. 주방장과 갈등이 생기는 원인이기도 하지요. 스스로 역량을 갖추는 게 중요합니다.

중소벤처기업부 인증 백년가게로 선정되었습니다. 각오가 더욱 새로울 것 같습니다.

서울시의 ‘오래가게’에 선정된 후 뒤이어 ‘백년가게’에 선정되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신락원을 잘 지켜온 만큼 저 역시 오래도록 가게를 이어가야겠다는 책임감이 커졌습니다. 앞으로 리모델링을 통해 룸 위주로 운영하고 싶습니다. 소중한 가족이나 지인들과 좋은 요리를 즐기면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10년, 20년 뒤에는 신락원의 명성이 더 높아질 수 있도록 흔들림 없이 주방을 지키겠습니다.

신락원
· 주소 : 서울 동대문구 전농로20길 2
· 전화 : 02-2244-0008
· 영업시간 : 11:30~22:00(브레이크 타임 15:00~17:00, 월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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