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상담

<30> 왕이 마신 감귤차

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지방관이 민가의 감귤(柑橘)을 진상한다고 칭탁하고 나무를 세어 장부에 기록하고, 열매가 겨우 맺을 만하면 열매 수를 세어 감독해서 봉하여 둡니다. 혹시 그 집 주인이 따는 일이 있으면 절도죄로 몰아대고 전부 관에서 가져가므로, 백성은 이익을 보지 못하여 서로가 원망하고 한탄합니다.

-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6월 10일

1427년 제주찰방 김위민(金爲民)은 제주 백성이 감귤 진상으로 고통받는 사연을 상소를 통해 올렸다. 그는 백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관아에서 10년 동안 감귤나무를 지속하여 심을 것을 주창했으며 부득이하게 민가의 감귤을 진상해야 할 상황이면 그 값을 넉넉하게 줄 것도 요청했다.

이처럼 백성이 고통받는 이유는 감귤이 그만큼 귀했기 때문이다. 제주의 특산품인 감귤은 수량이 한정되어 있었다. 또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풍랑으로 인해 배가 전복되기도 하였다. 무사히 육지에 도착해도 부패하기 일쑤였다. 조정에서는 더 많은 감귤을 진상할 것을 요구했고, 수요가 늘어날수록 공급이 따르지 못해 생산자인 농민만 더욱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감귤은 조선에서 다양하게 활용됐다. 먼저, 제사상에 올려졌다. 『태종실록』 태종 12년(1412) 8월 8일 왕의 조상을 모신 종묘 제향에 시물(時物)로 올렸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각종 국가에서 관장하는 여러 제사에서 제수(祭需)로 활용되었다.

다음으로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11월 21일 세 사신에게 청귤을 대접했다는 기록을 통해 사신 접대와 연회 등에 사용되기도 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신하들에게도 하사되었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오늘 정승들이 성균관에 가거든 선온(宣醞)하라. 지금 황감(黃柑) 1백 20개, 유감(乳柑) 1백 40개, 동정귤(洞庭橘) 3백 20개를 보내니, 승지는 가서 관각(館閣)의 당상(堂上)에게 나누어주라.”
하고, 또 어비(御批)로 출제(出題)하여 내리면서 일렀다.
“봉(封)해 보내어 유생들에게 짓게 한 뒤 과차(科次)를 정하여 아뢰라.”

- 『중종실록』 중종 31년(1536) 1월 10일

또 위 기록처럼 성균관 유생에게 감귤을 나눠주고 과거시험을 시행하기도 하는데 이를 ‘황감제(黃柑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약재로 쓰였다. 감귤은 두 종류로 진상됐다. 하나는 먹는 용도인 열매이고 다른 하나는 감귤 껍질이나 여린 나무껍질을 말린 것이었다. 바로 이 말린 껍질을 한약재로 이용한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에서 진상한 감귤품목이 실려 있다. 열매인 감자(柑子), 유자(柚子), 유감(乳柑), 동정귤(洞庭橘), 금귤(金橘), 청귤(靑橘), 산귤(山橘)과 함께 열매껍질인 진피(陳皮), 청피(靑皮), 지각(枳殼, 광귤), 지실(枳實)이 보인다. 조정에서는 감귤을 먹는 열매와 약재로 구분해 받은 것이다.

나라에서는 감귤의 안정적인 확보를 꾀하기도 했다. 태종은 태종 12년(1412) 11월 21일 별감 김용(金用)을 제주(濟州)로 보내어, 감귤 수백 그루를 순천(順天) 등의 바닷가 고을에 옮겨 심게 하기도 하였고 세종은 강화도에 옮겨 재배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감귤 생산지 확대 정책은 비용 대비 효율성이 떨어져 실패하였다.

“귤나무(橘木)를 옮겨 심은 것은 본디 잘 살 수 있나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는데, 수령이 가을에는 집을 짓고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들어서 보호하고, 봄이 되면 도로 이를 파괴하여 그 폐해가 한이 없으며, 그 귤나무의 길이가 거의 10척이나 되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 쓰는 긴 나무도 준비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몹시 곤란을 겪는다고 하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이것이 비록 한 군읍의 사소한 폐단이긴 하오나, 영세민의 근심거리를 진단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 5월 27일

세종은 이순몽의 청을 받아들여 백성의 고통을 생각해 강화도 감귤재배 실험을 중단하도록 한다.

이렇듯 왕실에서는 감귤 열매는 먹고, 껍질은 한약재는 물론 차로도 활용했다. 귤의 껍질인 귤피에 주로 꿀을 섞어 차로 만든 귤병차(橘餠茶) 등을 음용하였다. 특히, 영조 임금이 즐겨 마셨는데 『영조실록』을 보면 생강과 혼합한 귤강차(橘薑茶), 인삼을 넣은 삼귤차(蔘橘茶), 향부자가 가미된 향귤차(香橘茶), 계피를 더한 계귤차(桂橘茶), 소엽을 추가한 소귤차(蘇橘茶) 살구씨를 갈아 넣은 행귤차(杏橘茶)를 장복(長服)했다. 특히 계귤차는 승하하기 바로 이틀 전까지 마시던 것이었다.

귤의 약효는 귤피가 더 높다. 귤의 영양소는 알맹이 못지않게 껍질에도 많다. 진피에는 비타민 C를 비롯하여 항암작용을 하는 비타민P, 식이섬유인 펙틴,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테라빈유가 다량 함유되어 있다.

귤은 비타민C가 풍부하고 혈관의 탄력과 밀도를 유지시켜 기침 가래, 혈액순환에 좋다. 귤의 알맹이에 있는 하얀 실 같은 귤락은 독소배출과 소화 기능, 장 기능 강화 효능이 있다. 또 기(氣)의 순환을 좋게 하여 기가 잘 뭉치는 가슴과 상복부에 작용해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명나라 의서인 『의학입문(醫學入門)』에는 “기(氣)가 심하게 막힐 때 귤껍질만 끓인 귤피(陳皮) 일물탕이 효과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의보감』도 귤피의 약효에 대해 “가슴에 뭉친 기(氣)를 풀어주고, 기운이 위로 치미는 것을 막는다. 기침과 구역을 다스리고, 대소변을 잘 통하게 한다. 다만 많이 먹으면 담을 생기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 감귤을 하사할 적에 유생들의 앞을 다투어 탈취하기 때문에 분란이 일고 있는데, 이번에는 전일보다 더 극심하여 다투어 탈취하는 즈음에 행동거지가 해괴하였다고 한다. 명색이 선비로서 임금의 하사품이 중한 줄을 모르니, 더욱 한심한 일이다. 단단히 타일러 경계함이 옳다.” 하였다. 승지(承旨) 강선(姜銑)이 드러나는 대로 중률(重律)로 다스리겠다는 뜻을 더하여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 『숙종실록』 숙종 25년(1699) 1월 7일

  •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