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시간을 담는다. 카메라가 포착한 한 순간은 시대의 역사이자 한 사람의 역사가 된다. 울산 방어진에는 1930년부터 시간을 기록해온 사진관이 있다.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딸인 이순생 대표까지 3대째 이어지고 있는 ‘월세계사진관’이 그곳이다.
외할아버지부터 아들까지, 사진에 빠지다
“군대 간 아들이 사진학과에 재학 중이에요.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닌데 사진을 좋아하더라고요. 아들까지 이어진다면 4대째 잇는 사진관이 되지 않을까요?”
90년 가까운 시간동안 월세계사진관이 담은 시대의 얼굴은 얼마나 많을까. 일일이 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이곳에서 찍은 사진으로 누군가의 인생이 평생의 기록으로 남았으리라. 휴대전화 안에 카메라가 들어간 지 오래, 이제는 누구나가 카메라 하나씩을 손에 쥐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사진을 찍으며 기록한다. 그럼에도 사진관에서만 만날 수 있는 셔터 소리가 있다. 깔끔한 배경지에 단정하게 옷을 입고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찍는 증명사진은 여전히 골목 사진관의 존재 이유를 증명한다.
“저희는 졸업사진도 많이 찍거든요. 아이들에게 평생 남을 추억을 남겨주는 것이지요.”
할아버지의 유리판 사진부터 아버지의 필름 사진을 거쳐 딸의 디지털 사진까지 시대와 함께 변화해온 사진. 손에 든 카메라는 다르지만 셔터를 누르는 사진사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남기를!’ 이순생 대표는 그 진실한 바람을 사진에 함께 담아본다.
인생 최고의 순간을 찰칵
1930년부터 명맥을 이어온 사진관이라니 놀랍습니다. 그 역사가 궁금하네요.
일제시대, 일본인이 운영하던 사진관에서 외할아버지(故 홍재철)께서 일하셨습니다. 해방이 되어 일본인 사장이 떠나면서 외할아버지가 사진관을 인수하셨죠. 그러던 중 동네에서 그림도 잘 그리고 손끝이 야문 성실한 청년을 기사로 들였는데요. 그 분이 바로 아버지(이규복)에요. 사진을 배우면서 동시에 사위가 되었죠.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사진관을 이어받았고, 딸만 여섯인 집에서 둘째인 제가 아버지와 함께 사진관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동생도 함께 일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한 자리를 지키신 건가요? ‘월세계사진관’이라는 상호도 독특합니다.
동네는 크게 안 벗어나고 위치만 옮겼어요.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사진관 자리에 방어동사무소가 들어섰거든요. 일본식 건물이었던 기억도 어렴풋이 나요. 아버지가 사진관을 이어받으면서 ‘월세계사진관’으로 이름을 변경했는데요. 어머니가 작명소에서 고른 이름이라고 하더라고요. 달처럼 은은하게 세상으로 퍼져나간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어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사진관을 운영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피아노를 전공했거든요. 같은 예술 계열이니 다른 자매들보다는 낫겠다 싶었지요. 일단 아버지 밑에서 1년 정도 일을 배웠는데 아무래도 체계적이지는 않더라고요. 정식으로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 26살에 경성대학교 사진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소질이 있었는지 교수님이 유학을 권할 정도였어요. 학과에서는 물론 전체 수석으로 졸업을 했고요. 하지만 한창 공부해야 할 동생들이 많아 배움을 계속하지는 못하고 바로 아버지와 사진관을 함께 운영하게 됐습니다.
요즘 사진관을 찾는 손님들이 많나요? 주로 어떤 사진을 찍으시나요?
사진관에서는 개인 프로필 사진, 증명사진을 많이 찍어요. 코로나19 여파로 여권사진을 찍는 일이 많이 줄었지요. 선거철에 국회의원, 시의원, 구청장 후보들의 사진을 찍은 지도 오래됐습니다. 또 울산에서는 졸업사진으로 월세계사진관의 인지도가 꽤 높습니다. 그림 솜씨가 뛰어나고 디자인 감각도 남다른 아버지가 판에 박힌 듯한 졸업앨범의 구도를 완전히 바꿔놨거든요. 요즘에는 QR코드를 찍으면 영상도 볼 수 있도록 제작하고 있습니다. 또 제가 울산에서는 최초로 졸업 앨범을 찍은 여성 사진가에요. 여성 사진가라서 학생들이 훨씬 편하게 느끼는 장점이 있어요. 이야기도 많이 하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수학여행에 동행하면 금세 친해지기도 하고요. 지역사회에 오랜 시간 발붙이고 성장해온 만큼 기회가 되면 무료 영정사진 촬영도 하고 있습니다.
사진작가로서 가장 신경쓰는 자세는 무엇인가요?
카메라 앞에 서면 경직되기 쉽잖아요. 최대한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해요. 마음이 풀어져야 사진도 잘 나오니까요. 또 하나, 고객 만족을 최우선으로 둡니다. 졸업사진의 경우 노트북 6대를 가져가서 즉석에서 자신의 사진을 고르도록 합니다. 자신이 점찍은 사진이니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지요. 포토샵 후보정도 고객이 마음에 들 때까지 수정해주고요. 일단 월세계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으면 내가 원하는 사진이 나오니 만족도도 높고 입소문이 계속 나는 것 같습니다.
25년 이상 사진을 찍어오셨습니다. 사진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같은 피사체라도 각도와 빛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거든요. 그 미묘한 변화 속에서 대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사진을 건져냈을 때의 뿌듯함이 있지요. 때문에 누가 오든 동일하게 조명을 세팅해서 기계적으로 사진을 찍지 않아요. 이야기를 나누며 성격과 모습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조명을 바꿔가며 사진을 찍지요. 기술적인 것은 물론 사진가로서의 자세까지 아버지에게 배운 것들이 많습니다.
사진은 카메라 기술은 물론 시대의 유행에 맞춰 변화하는 것도 중요해 보입니다.
맞아요. 요즘에는 뽀얗게 포토샵을 한 듯 질감 없는 사진을 선호하세요. 하지만 질감이 살아있는 사진관 사진 특유의 매력도 분명히 있거든요. 전 그 중간 지점을 찾아 선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필름을 수정하던 것에서 포토샵 수정으로 바뀌는 동안 예전에 저희 사진관을 찾았던 손님이 손자들을 데리고 올 만큼 세월이 흘렀더라고요. 오랜 역사를 지닌 사진관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고민 중입니다.
사진을 전공하는 아드님까지 합류하면 4대째 이어지는 사진관이 될 텐데요. 어떤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방어진 일대가 문화거리로 바뀌면서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잇는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사진관인 만큼 그에 맞춰 변화를 모색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고풍스러움을 살리거나 흑백사진을 도입하는 등의 고민도 하고 있지요. 아들의 경우 더 넓은 곳에서 경험을 쌓은 다음 함께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사진의 역사 자체인 아버지와 현장을 잘 아는 저, 그리고 요즘 트렌드를 아는 아들이 함께 힘을 모으면 더 근사하고 오래 이어지는 사진관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월세계사진관
주소 : 울산광역시 동구 내진길 54
전화 : 052-251-2505
영업시간 : 오전 9시~오후 7시 반(단, 토요일은 오후 5시까지, 일요일은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