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동안 대비와 주상이 간 곳을 몰랐다. 오늘에야 정황을 알게 됐다. 주상이 대비의 학질(瘧疾)을 걱정해 몸소 필부의 행동을 친히 하였다. 대비의 병 치료를 위해 단마(單馬)에 환관 두 명만 데리고 궐 밖으로 나갔다. 심히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 『세종실록』 세종 2년(1420) 6월 7일
세종이 즉위한 후 태종은 상왕이 되었고, 원경왕후(元敬王后)는 대비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원경왕후는 세종 2년 5월 27일 학질을 앓기 시작한다. 그날 세종은 대비가 머물고 있던 낙천정(樂天亭)1)으로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학질은 말라리아 원충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제3급 법정감염병의 하나이다. 『동의보감』에서는 학질의 증상에 대해 “처음 발작할 때는 먼저 솜털이 곤두서고 기지개와 하품을 하며, 추워서 떨린다. 턱을 부딪치며, 허리가 아프다. 한기가 가시면 몸의 안과 밖에서 모두 열이 발생하며 두통이 심하다. 목마름도 이어져 찬물만 찾는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후 세종은 어머니의 학질을 치료하기 위해 시위들을 속여 밤에 개경사(開慶寺)2) 피병(避病)한다. 그리고 절에 머물며 승려와 함께 기도하는 등 그 행적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안팎에선 그 행방을 알지 못하였다.3) 대비와 임금의 행적을 몰라 노심초사하던 태종은 신하로부터 임금의 행적 보고를 받고 어머니를 위해 스스로 필부의 행동을 한 아들의 효성에 감동하고 이를 치하한다. 그런데도 원경왕후의 병이 호전을 보이지 않자, 최전의 집, 갈마골 박고의 집, 송계원 냇가, 선암, 동소문, 곽승우와 이맹유, 김승주 등의 집으로 옮겨가며 병을 고치고자 하였다.
원경왕후의 학질은 막내아들인 성녕대군(誠寧大君:1405~1418) 죽음이 원인이었다. 태종은 “성녕(誠寧)이 죽은 뒤로부터 상심하고 슬퍼하여 먹지를 않더니, 오늘에 이르러 그 위에 학질에 걸려서 파리하고 쇠약함이 더욱 심해졌다.”라며 원경왕후의 간접적인 학질 원인을 성녕대군 죽음으로 보았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죽은 성녕대군을 위해 절을 지어달라고 할 만큼 상심이 컸던 원경왕후는 그 죽음 이후 건강이 쇠약해져 있었고, 그것을 이겨낼 만한 힘이 없었다.
세종은 어머니의 학질이 낫지 않자 밤낮으로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탕약과 음식을 친히 맛본 뒤 어머니에게 올렸다. 그리고 민간에서 학질을 고칠 자를 수소문하는 한편 무당을 시켜 성신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방술을 시행하는 등 병환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으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학질을 앓은 건 원경왕후만이 아니었다. 형인 양녕대군, 본인인 세종, 아들인 수양대군이 모두 학질로 고통 받았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3년(1421) 8월 2일 학질로 힘들어하는 양녕대군에게 환관을 보내 문병하게 하고, 어의(御醫)와 주문(呪文) 읽는 승려로 하여 치료하게 했다. 28년(1446) 4월 12일에는 아들인 수양대군이 학질에 걸리자, 예전에 학질로 힘들어할 때 자신을 완치시킨 어의 노중례를 찾았으나 그가 세종의 학질을 치료할 때 쓴 약을 기억해내지 못하자 이를 질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왕실에서는 학질에 어떤 약을 썼을까.
『승정원일기』 현종 3년(1662) 7월 5일 기록을 보면 학질을 앓고 있던 이조참판 유혁연(柳赫然:1618~1680)에 대한 처방으로 내의원의 의관이었던 김립성(金立誠)은 청서육화탕(淸暑六和湯)을 복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육화탕(六和湯)은 더위가 심장과 비장을 상하게 하여 구토와 설사를 하거나 곽란(霍亂)으로 근육이 뒤틀리거나 부종(浮腫), 학질(瘧疾) 등의 증상이 나타날 때 사용하던 처방이다. 또한 『인조실록』 인조 23년(1645) 4월 23일 기록에 따르면 당시 소현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가 이를 학질로 진단하니, 다음날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熱)을 내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왕실에서도 증상에 따라 육화탕(六和湯)과 같은 탕약이나 침으로 열을 내리는 방법 등을 병행하였을 것이다.
학질, 말라리아는 현대에도 진행 중인 질병이다. 우리나라는 구한말 이후 위생상태가 개선되고, 기생충 약물이 도입되면서 현저히 감소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소멸국면에 이르렀으며 1984년 두 사례 이후 토착형 말라리아가 근절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1993년 휴전선 근처에서 재발생 후 다시 위세를 넓히고 있다. 2016년도 국내 발생 사례 중 초발 및 재감염 환자는 467건이나 된다.
2015년 중국의 도유유(屠呦呦)는 말라리아 치료 성분인 아르테미시닌(Artemisinin)을 발견해 노벨의학상을 수상한다. 그는 전통의서인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의 학질 치료법을 참조해 청호(靑蒿)4)에서 말라리아 치료 유효성분을 추출했다. 그 책에서 “청호일악(靑蒿 一握) 이수이승(以水二升) 지교취즙(漬絞取汁) 진복지(盡服之)” 하였는데 이는 ‘청호 1줌을 물 2되에 담근 후 걸러 즙을 짜 다 마신다.’는 뜻으로 그는 이 구절을 단서 삼아 비가열 추출로 항말라리아 성분을 찾은 것이다. 도유유는 중의학 원서, 민속처방 및 경험 있는 중의사 인터뷰를 통해 항말라리아 활성이 예상되는 처방을 수집했고, 약 200개의 중국 처방에서 380여 개의 추출물을 스크리닝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노력을 거듭했고, 마침내 이를 찾아내니 그것이 바로 청호의 신선한 잎에서만 추출되는 신약인 아르테미시닌이었다.
열이 펄펄 끓을 땐 간장을 조리는 듯 (熱熇熇煎肺腴)
귀신은 약속한 듯 네 어찌 찾아오며 (鬼耶胡能來有信)
복성은 온 성안을 어찌 두루 못 비추나 (星耶何不徧一城)
이제 장차 한 뿌리 동삼을 가지고서 (逝將一條孩兒蔘)
문 밖으로 귀신 몰아 평안을 얻고 지고 (長驅出門得安平)
-정약용(丁若鏞:1762~1836)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1권
임신 중 학질에 걸린 아내를 위해 학질을 쫓는 시를 지어 의원에게 보이다.
- 1) 낙천정(樂天亭)은 1418년에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한 태종이 그해 9월 대산(臺山)에 지은 정자로 당시 태종과 대비가 머물고 있던 이궁(離宮)을 일컫는다.
- 2) 조선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의 재궁(齋宮)으로 1408년(태종 8) 재궁을 개경사로 고치고 조계종에 소속시켰다.
- 3) 『세종실록』 세종 2년(1420) 6월 6일
- 4) 개똥쑥 또는 개사철쑥의 지상부를 그늘에 말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