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20> 세종이 선물한 만병통치약 청심원(淸心元)

양녕에게 소합원(蘇合元과 청심원(淸心元), 양비원(養脾元), 보명단(保命丹) 등의 약과 술 20병을 내렸다.

-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3월 20일

세종의 장남인 문종은 등의 종기(腫氣)인 등창으로 오랜 기간 고생하였다. 종기는 세균에 의한 염증반응으로 전통시대에는 지극히 위험했고, 통증 또한 심했다. 문종의 등창은 무려 한 자(약 30cm)에 이르렀다. 임금은 등창의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면서 정무를 수행해나갔다. 날마다 의원들이 병을 살폈으나 해로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고, 승하하기 며칠 전까지도 사신을 접견했으며, 활쏘기 구경도 하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종기의 화농이 터진 것이다. 이에 어의 전순의 등이 은침(銀針)으로 종기를 따 농즙(濃汁)을 두서너 홉을 짜냈다. 통증은 조금 잦아들었고, 어의들은 3~4일이면 완쾌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어의들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문종 2년(1452) 5월 14일 아침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임금의 상태는 급격하게 안 좋아졌고 급기야 목숨이 경각에 달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때 밖에 있던 수양대군은 어의를 채근하며 외쳤다. “어째서 청심원(淸心元)을 올리지 않는가?” 어의 전순의가 바로 청심원을 준비하여 올리려고 하였으나 한발 늦고 말았다. 문종은 그날 강녕전에서 승하했다. 춘추는 39세였다.

이러한 상황은 태조가 승하할 때도 발생한 일이었다. 태종 8년(1408) 5월 24일, 태상왕이었던 이성계의 병이 깊어지자 태종이 다급하게 달려와 청심원(淸心元)을 올린 것이다. 하지만 태상왕은 이를 삼키지 못하고 눈을 들어 두 번 태종을 쳐다보곤 그만 승하했다고 한다.

응급약이자 이렇듯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왕에게 올려진 청심원은 혼수상태, 발작, 간질, 뇌질환, 심장질환 등 비상 상황에서 쓰인다. 『동의보감』에서는 갑작스러운 중풍으로 인한 인사불성, 담연(가래)이 막힌 것, 정신이 희미한 것, 말하지 못하는 것, 구안와사, 손발을 못 쓰는 증상을 치료한다고 하고 있으며, 이밖에도 전광증(癲狂症), 발작, 정신착란, 신병(神病) 등에 두루 쓰는 처방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종 때 황필수(黃泌秀)가 쓴 『방약합편(方藥合編)』 역시 말을 하지 못하는 언어장애, 정신이 황홀하며 번거로우면서 답답하거나 정신이 안정되지 못하는 경우 그리고 일체의 발열 등의 병증을 치료하며, 매번 1환을 취하여 따뜻한 물에 타서 넘긴다고 하였다.

청심원에는 우황(牛黃)을 비롯해 사향, 산약, 서각, 대두황권, 감초, 인삼, 육계 등 약 30여 종 내외의 한약재가 들어간다. 우황이 들어갔기에 일반적으로 우황청심원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우황은 소의 담낭이나 담관에 생긴 결석을 건조 시켜서 만든 약재로 『동의보감』에는 혼백을 안정시키고 경계와 전광(癲狂)을 치료하며 건망에 주로 쓴다고 하였다.

조선 초, 청심원은 궁궐에서만 사용하던 귀한 약이었다. 일종의 만병통치약으로 중국 등에서도 크게 인기가 있었다. 이에 따라 명나라나 청나라에 가는 사신은 필수품처럼 가져가기도 하였다. 일례로 정조 14년(1790) 청나라 사신으로 갔던 서호수(徐浩修)가 남긴 『연행기(燕行紀)』 1790년 8월 20일 기록에 보면 군기 대신 복장안(福長安)과 패자(貝子) 영단(永丹)이 청심원을 요구해 주었다고 하였다.

한편, 납약(臘藥)이라 하여 섣달에 왕이 근신(近臣)들에게 약을 선물하는 전례가 있었는데 이 약에는 안신원(安神元), 소합원(蘇合元)과 함께 청심원(淸心元)이 있었다. 가까운 신하 이외에도 왕은 청심원을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태종은 말에 치여 다친 사람을 보고 청심원을 주게 하였고, 여진과 대치하고 있던 국경의 수비대장에게도 응급약으로 하사하였다. 또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사람을 보내 약을 구하자 이를 보내주기도 한다.

한편, 『세종실록』에는 세종 5년(1423)에 일어난 양녕대군과 청심원에 얽힌 이야기가 나온다. 세종 4년(1422) 10월 22일 이천에 머물고 있던 양녕대군은 천령(川寧) 사람 박득증(朴得中)의 집에 좋은 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몰래 가져오게 한다. 그런데 이때는 아직 태종의 상중이었고, 일전에도 탄핵이 있던 터라 행실을 자중함에도 또 한 번 기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에 대신들이 벌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세종은 일단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 보고자 사적으로 사람을 보내, 개를 훔쳐왔다는 종인 허금(許今)을 불러들이려 한다. 그런데 양녕대군이 그에게 말하길 “허금은 우리 집 안에 있다. 전하께서 허금을 잡아 오게 한 것은 다만 개에 관한 일 때문인데, 군신(君臣)의 예(禮)가 중한 것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리오마는, 마침내 너와 함께 보낼 수는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군신 간의 도리를 가벼이 여겼다는 이유로 삼사는 물론 육조 당상과 관원 모두가 벌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결국, 세종은 족친(族親)이라도 왕의 명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왕래하지 못하게 하는 등 그의 활동을 제한하고 거처를 이천에서 청주로 옮기게 한다. 일종의 유배를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우애가 남달랐던 세종은 그가 청주로 떠난 일주일 후인 세종 5년(1423) 3월 20일, 그에게 소주와 함께 청심원을 보내 그 마음을 위로한 것이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대체로 약(藥)을 써서 병을 다스리는 법은 증상에 따라 투약(投藥)하여야 그 효과를 얻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병의 근원은 살피지 아니하고, 만일에 급한 병을 앓게 되면 모두가 청심원(淸心圓)을 쓰니, 용약(用藥)하는 법에 어긋남이 있고, 또 청심원은 오로지 풍증을 주로 하는데 구급(救急)에 쓰니 오래 복용함은 불가합니다. 근래에 의정부·육조·승정원·의금부 등 각사(各司)에서 해마다 제작(劑作)하여 집집마다 그것을 간직하니, 병 앓는 집이 인연을 따라 구해 씁니다. 이 때문에 혜민국(惠民局)·전의감(典醫監)에서 이것을 사는 사람이 매우 적어져서, 일 년에 만든 것도 다 팔리지 않아 오래 묵어 못쓰옵는데, 만일 용뇌(龍腦)를 얻지 못하게 되면 소뇌(小腦)를 사용하여 약을 만드니, 특히 약성(藥性)을 잃게 되어 해(害)는 있을지언정 이익은 없습니다.”

- 『세종실록』 세종 22년(1440) 11월 22일

청심원이 만병통치약으로 소문나자 혜민국과 전의감뿐만 아니라 의정부, 육조, 승정원, 의금부 등 각 관청에서 너도나도 만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약은 알음알음 인연을 따라 환자에게 전해졌다. 청심원은 풍증을 주로 구급하는 용도로 오랜 복용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병증에 대한 정확한 처방이 아닌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무조건 청심원을 쓰니 약의 남용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만들어진 약의 효능은 담보할 수 없었다. 이에 세종은 승정원의 청을 받아들여 혜민국과 전의감에서만 청심원을 만들게 한다.

청심원은 소합원(蘇合圓), 보명단(保命丹)과 함께 조선에서 비싼 약 중 하나였다. 사향, 용뇌, 소합유 등 청심원에 쓰이는 많은 약재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심원은 대중에게 널린 쓰인 약은 아니었다.

이에 연산군 무렵부터 국내산 약재를 쓰는 ‘신선태을자금단(神仙太乙紫金丹)’이 주목을 받았다. 연산군 3년(1497) 이종준(李宗準)이 저술한 같은 이름의 책 『신선태을자금단』은 바로 신선태을자금단의 제조법과 효험을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태을자금단’의 약효가 신기한 것을 경험하고 여기에 ‘신선(神仙)’이라는 글자를 붙여 그 방문을 언해하여 쓴 것이다. 『본초강목』에서는 이 태을자금단을 만병해독환(萬病解毒丸) 혹은 옥추단(玉樞丹)이라고 하며 여러 가지 독을 풀어주고, 여러 가지 창을 치료하며, 관절을 부드럽게 하고, 온갖 병을 치료하여 죽은 자를 살려 내는데, 그 효과를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약의 재료는 산자고(山慈姑), 천오배자(川五倍子), 천금자인(千金子仁:속수자 씨앗), 홍아대극(紅芽大戟), 사향(麝香)이다. 하지만 그 약효와 효능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이에 비해 청심원은 현대까지도 주요한 약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한의원에서 처방은 물론이고 약국에서도 시판되고 있다. 풍증, 언어장애 등은 물론이고 시험이나 면접을 앞둔 수험생 등에게 인기가 높다. 그러나 청심원은 체질, 질환에 따라 효과가 차이가 나고 맞지 않을 시 부작용이 날 수 있기에 한의사와 상담한 뒤 증상에 맞는 처방을 받는 게 바람직하다.

오늘 황제가 보화전(保和殿)에 납시어 연종연(年終宴)을 베풀었다. 정사와 부사만이 참가하는 것이 규례였다.
그분들이 돌아온 뒤에 그 절차에 대한 것을 물었더니,
“오고(五鼓)에 보화전으로 들어가 문 아래에서 잠깐 쉬었다가 전정(殿庭)으로 나갔다. ...(중략)...그들의 뒤를 따라 올라가서, 설시한 한 장의 풍악을 베푸는 것을 보았다. 풍악이 끝나자 놀이를 벌였는데, 놀이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더러는 말을 타고 충돌하는 형상을 이루기도 하고 또 어린아이 한 떼가 단정한 걸음걸이로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리고 춤이 끝나자, 또 커다란 장정 10여 명이 씨름을 벌였는데 분주하게 끝내어 볼만한 것이 못되었다.
양국 사신에게 각각 술 한 잔씩을 하사했는데, 잔은 은(銀)잔이었다. 잔치가 파하자 돌아오는데, 길이 태화전(太和殿) 뜰로 나 있었다. 마침 수리하고 청소하느라 태화전 문을 활짝 열어 놓았기에 청심원 다섯 알을 뇌물로 주고 태화전 안에 들어가서 두루 구경하였다.”
하였다

- 김경선(金景善) 『연원직지(燕轅直指)』 순조 32년(1832)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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