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상담

<24> 정소공주(貞昭公主)의 태교(胎敎)

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묘지명에 말하기를
‘애처로운 현철한 아가씨여! 일찍부터 태교를 받으시어 덕과 용모가 뛰어나셨네. 능히 삼가하고 효도하셨네. 천도가 창망(蒼茫)하여 어느덧 유명을 달리하셨네. 국인(國人)들의 슬픔이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길한 땅으로 점을 치고 좋은 날로 정했으니, 이미 굳고 또 정밀하여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3월 23일

정소공주(貞昭公主)는 1412년 세종의 맏딸로 태어났다. 태종에게도 그녀는 첫 손녀였기에 수시로 어르고 달래며 귀여워했고, 세종 역시 친히 글을 가르칠 정도로 그녀를 아꼈다. 그러나 이처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딸이었던 정소 공주는 열셋 어린 나이인 1425년 2월 25일 그만 세상을 달리하고 만다. 이에 상심한 세종은 나랏일을 돌보지 못할 정도로 비통해하였고, 공신과 당상관들 또한 성문 밖에까지 나가 장송(葬送)하고 각기 노제(路祭)를 베풀었다.

공주는 나면서부터 현숙하고 완순(婉順)하며, 자태와 용모가 단정하고 개결(介潔)하셨다. 유난히 총명하고, 슬기로우셨다. 자라서는 장중(莊重)하고, 말이 적고, 즐거워하고 성냄이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으셨다. 임금과 중전께서 사랑이 지극히 깊으셨다.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모두 공경하고, 우러러보았다. 공주는 엄숙하면서 화목한 행실이 있어 길이 귀척(貴戚)들의 의범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결혼도 하기 전에 양궁(兩宮)에게 슬픔을 끼치셨다. 진실로 천도(天道)란 알 수 없는 것인가. 아아, 슬프도다.

-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3월 23일

예문 제학 윤회는 왕녀묘지명(王女墓誌銘)을 지어 못다 핀 공주를 기렸는데 그 기록에 보면 세종에게 이처럼 슬픔을 안긴 공주는 태교를 받고 태어났다. 그녀는 문헌상으로는 조선왕실 가족 중에서 최초로 태교를 받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녀묘지명‘에도 덕이 깊고 용모가 빼어남을 태교 덕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태교는 임부(姙婦)가 행동, 언어, 음식 등 생활 전면을 방정(方正)히 하여 태아(胎兒)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태교는 예부터 우리나라와 중국의 왕실, 사대부에게서 행해졌다. 통일신라 시대 활약한 승려 원랑선사(圓朗禪師)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890년)에는 “사를 잉태한 날부터 예절을 지키고 행동을 삼가했으며 경전을 외우는 것으로 태교를 했는데 태어나는 때에 보니 과연 평범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고려사』엔 태조 왕건의 후비이자 경종(景宗)의 외할머니이며 성종(成宗)의 친할머니인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가 태교를 받고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으나 본격적으로 태교가 시작된 것은 세종 무렵부터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유교적 영향이다. 중국에서 태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주나라의 태임(太任)이 문왕(文王)을 가졌을 때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이는 가의(賈誼:B.C200~168)의 『신서(新書)』를 비롯해, 왕충(王充:27~?)의 『논형(論衡)』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논리는 태교를 수행하는 산모를 잘 이끌어 권력의 핵심에 있는 제왕을 잘 태어나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태교가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조선 태종 때 명나라 영락제의 황후가 숨지자 이조판서 남재를 조문 사절대표로 파견하여 올린 글에는 황후가 태자를 가졌을 때 태교를 했음을 말하고 있다. 조선의 경우 태종 때 들어온 중국의 『열녀전』에는 “태임이 (주(呦)나라의) 문왕(文王)을 임신하였을 때 눈으로는 나쁜 것을 보지 않았고,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오만한 말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태임은 태교를 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바, 『조선왕조실록』 전반에 걸쳐 성군(聖君)을 낳은 태임의 이 태교는 본받아야 할 표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1)

대표적으로 정조 임금을 낳은 혜경궁 홍씨가 돌아가시자 올린 「애책문(哀冊文)」에는 “왕실의 며느님이시자 문왕(文王)의 어머님과 같았습니다. 덕이 아름다워 이미 태교(胎敎)를 하였고, 말씀은 근본을 미루어 『시경(詩經)』을 본받았습니다.”(『순조실록』 순조 16년(1816) 1월 21일)라고 하여 그 덕을 말하고 있다.

둘째로 조선 초기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 등의 의학 서적이 편찬되었다는 점이다. 이 의서 중에는 중국 송나라 진자명이 지어 15세기에 소개된 『부인대전양방(婦人大全良方)』에서는 「태교문(胎敎門)」이라는 항목을 따로 두었고 “임신하고 3개월이 되었을 때는 보는 사물에 따라 변화된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이 태교(胎敎)를 만들어 자식이 태어나서 착하고 오래 살며 충효하고 어질며 의롭고 총명하며 질병이 없게 하였다. 대체로 열 달 동안 항상 좋고 밝은 모습만 보도록 하며, 사악하고 후미진 것을 피하는 것이 진실로 좋은 교육인 것이다.”라고 하여 이를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세종 시대의 태교는 어떠했을까. 세종 때 지은 『태산요록(胎産要錄)』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당나라의 의학 전서인 『천금방(千金方)』 등 15종의 의학서를 참고하여 편찬한 『태산요록』은 임신과 육아의 질병 치료에 대한 20여 항목을 다루고 있다. 『태산요록』에서도 『부인대전양방』처럼 태교의 중요성을 임신 3개월에서 찾고 있다. 이 무렵의 태아는 환경에 영향을 받기 시작하는 데 아직 성품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권유했다.

현인과 군자 등을 만나고, 좋은 향을 피우고, 입으로는 시경과 서경을 읽는다. 거처는 깔끔하게 하고, 반듯하게 잘린 것을 먹고, 반듯한 자리에 앉는다. 현악기 관악기를 손으로 익히며 음악을 즐기며, 귀로는 그릇된 말을 듣지 않고, 눈으로는 나쁜 것을 보지 않아야 한다.

- 『태산요록』 「태교론(胎敎論)」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는 정소공주를 비롯해 문종과 세조 그리고 안평대군을 궁궐이 아닌 사저(私邸)에서 낳았다. 왕실의 엄격한 태교가 아니라 민가의 태교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경복궁에서 출산한 다른 왕자들 역시 전례에 비추어 보면 16세기 이후 왕비처럼 엄격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 택일 등의 번거로움은 없었고, 임신 후 조심하고, 관리하는 태교로 보인다. 그렇다고 소홀함이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종의 둘째 며느리이자 세조의 비이며 또한 예종의 어머니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경우 그 어머니인 흥녕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이 죽자 세조가 직접 이를 추모하여 올린 글을 보면 “어질고 덕 있는 이를 낳으시어, 나의 좋은 보좌가 되어 내정(內政)을 잘 닦고 외화(外化)를 도와서, 집과 나라가 편안하게 되고 자손들도 보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바로 내 몸소 행한 것뿐만 아니라 사실 태교(胎敎)에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세조실록』 세조 2년(1456) 7월 23일)라 하였다. 이 글에서 그 덕이 태교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하고 있음을 미루어볼 때 적어도 양반 가문에서는 태교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왕실에서는 계획적인 임신을 한다. 제조상궁과 관상감이 협의로 정한 길일에 왕과 왕비의 합궁을 진행했다. 좋은 날이어도 경건하지 못한 주변 상황이 발생하면 날을 다시 잡았다. 천둥, 심한 안개, 심한 바람, 일식, 월식, 동지, 하지, 초하루, 보름, 그믐, 질병 등이 변수가 되었다. 이어 왕비의 잉태가 확인되는 순간부터는 섭생(攝生), 생각, 운동 등의 엄격한 관리 속의 태교가 시작되었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오늘이 바로 입진하는 길일인데, 날씨가 맑고 따뜻하여 양춘(陽春)의 기상이 있습니다. 천심(天心)이 돕고 있음을 이에서 알 수 있으니, 더욱 경축해 마지않습니다. 옛사람의 태교(胎敎)에 관한 가르침에, ‘바른말만 하고, 바른 일만 행하고, 자른 것이 바르지 않으면 먹지 않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며, 밤이면 소경으로 하여 시(詩)를 외게 한다.’는 것이 모두 태교하는 방법입니다. 삼가 의관이 전한 바를 듣건대, 조리의 탕제도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다고 하니, 너무도 다행입니다. 그러나 모든 기거(起居)하는 일을 십분 조심하여 보호하는 방도를 다하시기를 깊이 앙축(仰祝)합니다.”
하니, 상(고종)이 이르기를,
“태교에 관한 말이 과연 그렇다.”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2월 28일

왕비의 거처 또한 그야말로 태교의 장으로 변했다. 위 기록처럼 왕비가 머무는 거처도 엄격히 정비되었으며 아름답거나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소리만을 들었으며, 소경으로 하여 좋은 글을 읽게 하여 이를 듣기도 하였다.

1801년 사주당 이씨가 지은 『태교신기(胎敎新記)』를 보면 “귀인이며 호인이며 흰 벽옥(碧玉)이며 공작새며 빛나고 아름다운 것과 성현의 가르치고 경계하신 글을 읽고 신선의 관대(冠帶)하고 패옥한 그림을 본다.” “오직 마땅히 사람을 두어 글을 외우고 옛날 책 속의 글을 말하거나 아니면 거문고나 비파를 타주어 임부의 귀에 들려주게 할 것이니라. 이것이 임부의 귀로 듣는 것이니라.”라 하였으니 궁에서도 백옥(白玉)과 같은 장신구를 몸에 지니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며 거문고와 가야금 같은 소리를 곁에 두고 듣기도 하였을 것이다. 또 태교란 임신부 자신뿐만 아니라, 온 집안사람들의 일이었기에 남편과 가족도 태교의 주체임을 강조하였는데 그리하여 임금 또한 다른 후궁과의 잠자리를 자제하였고, 형벌이나 도살 등을 금지하는 등 함께 노력하였다.

임금께서 내관(內官) 최득룡(崔得龍)에게 명하여 왕녀(정소공주)에게 제사 지내게 하였다. (친히 지으신) 그 제문에 말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수요(壽夭)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은 비록 옮길 수 없는 것이나, 부자간의 지극한 정리는 스스로 끊을 수 없구나. 슬프다. 너의 일생은 연약한 여식으로 자라났다. 자태가 단정하고 맑으며, 품성(稟性)은 곧고 아름다우며, 손을 이끌고 다닐 때부터 효제(孝悌)함이 너의 행실이었다. 나이는 어렸지만은 성인(成人)과 같았다. 자애의 정이 쏠리어 어루만져 사랑하기를 더욱 두터이 하였다. 네가 결혼하여 함께 편히 영화를 누리려 하였더니, 어찌 어린 나이로 하찮은 병에 걸려 좀 더 살지 못하고 드디어 대고(大故)를 당할 줄 뜻하였으랴. 조섭(調攝)을 잘못 하였던가, 기도함이 궐(闕)하였던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성음과 용모는 완연하건만 정상(精爽)한 넋은 어디로 갔는가. 가슴을 치면서 슬퍼하며, 눈물을 참으려 하니 가슴을 적신다. 빈실(殯室)에 치제(致祭)하여 슬픈 회포를 펴고자 하니, 넋이 알음이 있거든 내 이 말을 알리라.”
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3월 3일

  • 1) 『논어(論語)』를 보면 유학의 시조인 공자는 “주나라는 하나라와 상나라를 거울삼았으니, 빛나고도 문채 나도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라고 하여 정치적으로 주(呦)나라를 정치적인 국가로 여겼다. 그 중 특히 상(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우고 태평성대를 이끈 무왕, 문왕, 성왕의 시대를 가장 이상에 가까운 시대로 여겼다.
  •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