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상담

<22> 침향(沈香)과 내의원 외부인 출입금지

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젊은 나이에 우연히 병에 걸려서 백약이 무효하여 세상을 떠났네. 길이 손발이 이지러짐을 생각하니, 심간(心肝)을 베어내는 아픔을 어이 이기리오. 부왕의 상례를 다하기도 전에 동생이 이승을 하직했네. 아, 이 서러움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어린 조카가 갑자기 믿고 의지할 곳도 잃었도다. 슬픔을 머금고서 말을 엮어 사관을 보내 전(奠)을 드리노라. 슬프다. 살아서는 남매로서 항상 친애한 마음을 두터웠는데, 죽어 가니 유명의 길이 다르구나.

-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2월 2일

1424년 2월 9일, 내약방(內藥房)에 희대의 도난 사건이 발생하였다. 내약방의 사령(使令)이 진상약(進上藥)과 침향(沈香)을 도둑질한 것이다. 이에 세종은 “내가 먹는 것은 지중(至重)한 것이거늘, 어찌하여 이러한 간세(奸細)의 무리를 안에 들여 심부름하게 하였는가!”라며 화를 내며 세종은 내약방에 외부인 출입을 금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내약방은 왕과 왕실의 전용의료기관이었다. 조선 개국과 함께 설치돼 세종 25년(1443)에 내의원, 고종 때는 태의원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사령(使令)은 관청에서 심부름이나 죄인에게 곤장을 치는 등을 업무로 하는데 내의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그 사령이 임금 전용 약제실에 들어가 진상약과 침향을 훔쳤으니 그야말로 조정과 왕실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세종은 이를 왕실 경호 체계의 붕괴로 파악하였다. 임금의 건강을 다루는 의료기관에 아무런 제재도 없이 비의료인이 출입하는 허술함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관련 책임자인 지신사(知申事) 곽존중(郭存中)과 동부대언(同副代言) 정흠지(鄭欽之)는 대죄를 청했고, 임금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비록 고위관료라고 해도 관계자 외엔 내약방 출입을 엄격히 금지한 것이다.

그러나 20년 후 이러한 도난 사건이 또 발생하고 만다. 세종 27년(1445) 3월 14일 내의원(內醫院)의 남자 종이었던 희도(希道)와 중화(仲和)가 주사(朱砂)와 침향(沈香) 한 토막을 도둑질하여 팔다가 일이 발각된 것이다. 임금의 약에 손을 댄 이 사안의 중대성에 따라 국문이 열렸고, 임금은 승정원에 재발 방지책 마련을 지시한다. 공교롭게도 두 차례 도난 사건은 모두 내부자 소행이었다.

임금을 위한 약재여서 만약 훔치다가 걸리면 죽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게 만든 약재가 바로 침향(沈香)이었다. 『세종실록』에 23차례나 기록된 침향은 당시 금보다 귀한 약재였다.

동남아시아 지방인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에서 생산되는 침향은 주로 일본의 중개무역을 통해 공급되었다.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圭籌)·범령(梵齡)과 도선주(都船主) 구준(久俊) 등 1백 35인이 대궐에 나아가서 토산물을 바치니,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서 예를 받은 뒤에, 규주와 범령은 대궐 안에 들어오도록 명하고, 구준은 대궐 밖에 있도록 하였다.
...(중략)...임금께서 말하기를,
“(일본)국왕이 요구한바 대장경판(大藏經板)은 우리나라에 오직 1본 밖에 없으므로 요청에 응하기 어렵고, 다만 밀교(密敎)대장경판과 주(註)화엄경판과 한자(漢字)대장경의 전부를 보내려고 한다.”
...(중략)...
(그 일본 국왕의 서간에 이르기를) 변변치 못한 토산물을 별폭(別幅)과 같이 갖추었고, 냇물이 밀어 닥치듯이 이르는 상서(祥瑞)를 많이 맞으시고, 또 하늘이 주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감히 바랍니다. 별폭 경사류제(經史類題) 20권, 백련위(白練緯) 50단(段), 침향(沈香) 30근, 백단(白檀) 50근, 단목(丹木) 1천 근, 호초(胡椒) 30근, 감초(甘草) 50근, 곽향(藿香) 20근, 동(銅) 2백 50근."
이라 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12월 25일

일본은 태조 시절부터 대장경을 구했다. 정종 1년(1399)에는 대장경을 청하는 아직 완전치 못한 것들이 있어 보충하여 보내줄 것을 약속하기도 했으나 이루어지진 않았다. 세종 시절 그들은 “만일 경판(經板)을 받들고 올 수 없을 땐,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까지 하며 대장경판을 청한다. 세종 역시 한때 양국의 우호증진을 위해 양도를 고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반대하자 고민 후 대장경판이 1부밖에 없어 줄 수 없다고 그 청을 거절한다. 바로 이때, 대장경을 얻기 위해 보낸 일본의 품목 중에는 침향이 있었다.

중국에서도 구하기 힘들었던 침향은 일본으로부터 계속 공급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구하기 어려워진다. 조선에서 너무 값을 낮게 책정하자 일본이 공급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10년(1428) 10월 20일에는 이러한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침향(沈香)으로 말하면 비록 중국에서라도 쉽사리 얻지 못할 것이다. 지난번 왜인들이 가져오는 침향이 흔히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값 깎기를 너무 헐하게 하였으므로 다시는 가지고 오지 않는다. 침향은 왜(倭)나라에서도 나지 않는지라 널리 다른 나라에서 구하여 가져오는 것이니, 비록 그 값의 갑절을 준다 하더라도 가하니, 예조에서는 그것을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처럼 세종은 침향은 일본에서도 나지 않은 것임을 언급하며 그들 또한 노력하여 이를 구해왔으니 그 노력에 맞는 정당한 대가를 줄 것을 명령한다.

이밖에도 중국과의 사이에서 외교 물품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일찍이 『고려사』를 보면 문종(文宗) 33년(1079) 7월 기록에는 송나라 황제가 문종이 풍비증에 걸려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의원과 약재를 보내왔는데 그 약재 중 침향이 있었다.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태종실록』 태종 4년(1404) 11월 1일 기록을 보면 진하사(進賀使) 이지(李至) 등이 받아온 회사품의 목록에는 침향이 있었다. 이후에도 회사품에는 중국 황제가 조선 국왕에게 보낸 회사품에는 어김없이 침향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비싼 값을 지녔기에 침향은 조선의 대표적인 사치품이었다. 『연산군일기』에는 질 좋은 침향을 궁궐에 들이라는 명이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연산군일기』 연산 8년(1502) 11월 5일에 “왕이 전교하기를 침향(沈香) 10근과 침속향(沈束香) 20근을 대내로 들이라고 하였다.” 하면서 사관이 말하기를 이때 왕의 사치가 날로 심하여 후원(後苑)과 별전(別殿)을 모두 향을 태워 따뜻하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에는 “친향(親享)을 하거나 향을 친전(親傳)할 때에는 침향(沈香)을 사용한다.- 무게는 1냥 2돈이다.-향축(香祝)을 전하는 것은 여러 묘(廟)나 묘(墓)보다 우선 한다.”고 하여 이를 통해 왕실에서 제사를 지낼 때 침향을 사용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귀한 침향은 신비의 영약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약효가 전신에 두루 미친다. 두뇌를 맑게 하고, 위와 장을 보하며, 남성의 정력 또한 키운다. 소변이 잦고, 하복부가 차거나 월경이 불순한 경우에도 효과적이다. 그리고 호흡하기가 힘든 만성 기관지 천식이나 급성위장염, 허약체질의 보조 약재로서도 효능이 뛰어나다.

『동의보감』에서는 침향에 대해 “성질이 뜨겁고 맛은 매우며 쓰고 독이 없다. 풍수(風水)로 심하게 부은 데 주로 쓴다. 악기(惡氣)를 쫓고 명치가 아픈 것을 멎게 하며, 정을 보하고 양기를 북돋운다. 찬바람으로 마비된 것, 곽란으로 토하고 설사하며 근이 뒤틀리는 것을 치료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진기(眞氣)를 오르내리게 한다. 또, 여러 가지 기를 길러주어 위로는 머리에 닿게 하고 아래로는 발바닥에 닿게 한다.” 또 “명문의 화가 부족한 것을 보한다. 가루 내어 약에 넣거나 물에 갈아서 그 즙을 먹는다.”라고도 하였다. 이는 항균효과와 기관지, 천식, 관절 등에 효과가 좋음을 보여주며 이에 따라 공진단을 비롯하여 고총침환(古蓯沈丸), 고침부탕(古沈附湯) 등 다양한 처방의 약재로 활용되었다.

명나라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에서는 “입으로 씹어서 향이 나고 단맛이 나는 것은 성질이 평하고, 매운 것은 성질이 뜨겁다.”라고 하며 주요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풍수(風水)로 인한 종독을 치료하고, 나쁜 기운을 제거한다. 심복통, 곽란으로 인한 중악, 사기와 귀신을 치료하거나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할 때는 모두 술에 달여서 복용해야 한다. 여러 가지 창종에는 고약에 넣어서 써야 한다.
속을 고르게 하고, 오장을 보해 주며, 정(精)을 보익하여 양을 튼튼하게 하고, 허리와 무릎을 따뜻하게 하며, 전근(轉筋)과 구토와 설사로 인한 냉기를 멎게 한다.
징벽(癥癖)을 깨뜨리고, 냉풍으로 인한 마비, 뼈마디가 약해진 증상, 풍습으로 피부가 가려운 증상, 기리(氣痢) 등을 치료한다. 우신(右腎)의 명문(命門)을 보해 준다. 비위(脾胃)를 보해 주고, 비(脾)에 생긴 담연과 출혈을 치료한다.
기를 증가시켜 정신을 화평하게 한다. 상부는 뜨겁고 하부는 차가운 증상, 기가 거슬러 숨이 차는 증상, 대장이 허하고 막힌 증상, 소변이 방울져 나오는 증상, 남자의 정액이 찬 증상 등을 치료한다.

다양한 약효를 지니고 있었던 만큼 왕실의 약재로서도 큰 대접을 받았다. 특히, 왕들은 침향이 포함된 약으로 병에 대한 치료를 진행하였다.

『승정원일기』에는 숙종 41년(1715) 9월 28일에는 왕이 한열(寒熱)이 계속되자 가감팔미탕(加減八味湯)에 침향과 육종용(肉蓯蓉)을 더해 처방하였고, 숙종 45년(1719) 3월 12일엔 변비가 심해 사마탕에 침향과 빈랑(檳榔)을 더하여 복용하면 시원하게 변을 볼 것이라고 하자 그리하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경종 1년(1721) 8월 13일에는 경종의 증상을 담화(痰火)로 인해 생긴 것으로 진단하고 신비침향환(神秘沈香丸) 1제와 가미조중탕(加味調中湯) 5첩을 지어 심신 안정을 꾀하였다. 그리고 영조 2년(1726) 4월 11일에는 왕대비전(선의왕후)의 땀이 나는 증상, 신물이 올라오는 증상, 가슴이 막히는 증상, 배가 찬 증상 등의 여러 증후가 있자, 오약침향탕(烏藥沈香湯)을 먹어 효험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을 보면 정조는 변향부(便香附), 백복신(白茯神), 귤피(橘皮)로 만든 교감차(交感茶)를 수십 년간 복용해 위장과 체증에 큰 효과를 보았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여기에 인삼과 침향(沈香)을 넣어 먹으면 더욱 좋다는 자신만의 제조법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천단(天坍).
(북경의) 천단은 영정문(永定門) 안에 있는데 담장이 둘려졌으며, 10리(里) 둘레에 그 형체는 정원형(正圓形)으로 되어 구부러지거나 꺾어진 데가 없다. 서쪽으로 향하여 극문(戟門 창살문)을 설치했는데, 문은 모두 깊숙이 닫혀 있고, 별도로 문비(門扉)를 만들어 가렸다.
...(중략)...
조각한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중간에 높은 탑을 안치하고 노란 비단으로 덮었다. 전중(殿中)에는 세 겹의 석란(石欄)을 둘렀는데 평지에서부터 점점 높아져서 층계를 만들어 놓았다. 난간문 양쪽에는 검은 동철(銅鐵)로 만든 큰 향로(香爐)를 놓고 침향(沈香)을 피우므로 온 경내는 향내가 진동한다.

- 이해응(李海應:1775-1825) 『계산기정(薊山紀程)』(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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