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17> 조선과 일본의 외교 약재와 코뿔소 뼈인 서각

대마도의 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이 사람을 보내어, 용뇌(龍腦) 4냥, 서각(犀角) 2근, 필발(蓽發)054) 80근, 육두구(肉荳蔲) 30근을 바치니, 면포 70필을 회사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3년(1421) 4월 16일

태종 17년인 1417년, 명나라 사신 황엄은 조선의 임금과 왕세자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바쳤다. 왕세자가 받은 선물은 코끼리 어금니로 만든 젓가락인 상저(象筯), 수를 놓은 비단 주머니인 수낭 그리고 코뿔소 뼈로 만든 허리띠인 서각대(犀角帶) 1개였다. 당시 왕세자는 세종이 아니라 아직 양녕대군이었다.

서각(犀角)은 조선에서 나지 않아 명나라나, 일본, 유구(琉球)에서 구해야만 했다. 특히 조선과의 교역을 원하는 일본은 귀한 약재 서각을 외교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 증거로 세종 즉위 후만 해도 일본 정부와 일본의 영주들로부터 30여 회나 선물로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초에 도도웅와(都都熊瓦)가 서신을 보내어 단목(丹木) 4백 근, 호초(胡椒) 1백 50근, 필발(蓽發) 50근, 서각(犀角) 1개를 보냈는데, 나라에서 퇴송하고 또 그 사신까지 예로 대접하지 아니하였더니, 이날에 이르러 (사신이) 돌아가게 되었다. 예조 판서 허조와 병조 판서 조말생을 시켜 예조(禮曹)에서 모여 사자(使者)에게 전유(傳諭)하였더니, 사자(使者)가 대답하기를,
“도도웅와가 소이전(小二殿)의 슬하에 있어서 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고, 종준(宗俊)은 쫓겨난 것이고, 웅수(熊壽)는 나이 젊고 또 가난하게 지내니, 그때로 말하면 이 섬의 일을 주장할 만한 자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회례사가 갔다 돌아올 때는 부끄러이 여겨서 능히 나와 보지 못한 것이나, 그 조부 영감(靈鑑)으로부터 조선(朝鮮)을 섬기기를 부모와 같이 우러러 받들었으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2년(1420) 11월 15일

1420년 11월에 대마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가 단목(丹木) 4백 근, 호초(胡椒) 1백 50근, 필발(蓽發) 50근, 서각(犀角) 1개를 보내왔으나 세종은 일본의 선물을 거절한다. 이는 그 1년 전 대마도 정벌의 여파였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1)는 생존을 위해 그 해 윤1월에는 조선으로의 귀속을 청하기도 했었다.(『세종실록』 세종 2년(1420) 윤1월 10일)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들이 바친 토산물을 받지 않았고, 사신을 예로 대접하지도 않았다. 대마도주의 겉과 속이 다르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사신은 “조선(朝鮮)을 부모처럼 우러러 섬기고 있습니다. 딴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사실 대마도 정벌은 일본과 일본 각지의 영주에게 충격이었다. 특히 조선과 인접한 규슈(九州) 지방의 영주들은 안보 불안을 해소하고 경제와 문화의 실익을 위해 조선에 자주 사신을 보내왔다. 세종 시대 규슈에서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만 해도 70여회에 이른다. 그리고 그 물품이 쓰여 있는 기록에는 어김없이 코뿔소 뼈인 서각이 들어 있었다.

앞서 세자시절 양녕대군에게 중국의 사신이 서각으로 만들어진 허리띠를 선물로 주었듯 서각은 보통 고관대작이 착용하는 관대(官帶:관복의 허리띠)의 재료로 활용되었다. 고려 시대 사서인 『고려사절요』 1208년 윤4월 기록에 따르면, 희종이 최충헌에게 옥대(玉帶) 하나와 통천서각대(通天犀角帶) 둘과 남정(男鋌) 15근(斤)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명년 원정(元正)부터 비로소 명나라에서 제정한 관복(冠服)을 입게 하고 예조로 하여 상심(詳審)하여 정하게 하니, 예조에서 보고하기를,
“1품은 홍포(紅袍)·서대(犀帶)요, 2품에서 판각문(判閣門) 이상은 홍포(紅袍) 여지 금대(荔枝金帶)요, 3, 4품은 청포(靑袍)·흑각 혁대(黑角革帶)·상홀(象笏)이요, 5, 6품은 청포(靑袍)·흑각 혁대(黑角革帶)·목홀(木笏)이요, 7품 이하는 녹포(綠袍)요, 대(帶)와 홀(笏)은 5, 6품과 같고, 신[靴]은 모두 검은 빛깔로 사용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 『태조실록』 태조 즉위년(1392) 12월 12일

조선 건국 시 예조에서 올린 조정의 관복제도에 따르면 1품은 홍포(紅袍)에 서각대(犀角帶)를 두르고 상아의 홀을 든다고 하였다. 이후 『세종실록』 세종 8년(1426) 2월 26일 공복제도에 따르면 사무를 볼 때 입는 공복(公服)의 경우 1품은 옥대(玉帶), 2품은 화서대(花犀帶), 3품은 금은화대(金銀花帶), 4품은 소금대(素金帶) 5품은 은급화대(銀鈒花帶), 6품과 7품은 소은대(素銀帶), 8품과 9품은 오각대(烏角帶:흑각대)를 착용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화대(花帶)란 장식을 한 띠이고, 소대(素帶)는 장식이 없는 띠이며 흑각대는 검은 물소 뿔로 만든 띠이다. 이렇듯 서각대가 높은 관직을 상징하는 물품이다 보니, 돈 있는 향리들이 너도나도 이 서각을 착용하였고 그 때문에 사회문제가 되자 세종은 이를 바로잡으라고 명하기도 하였다.(『태조실록』 세종 24년(1442) 9월 25일)

그리고 조선의 선비에게 서각(犀角)은 출세의 상징인 동시에 굳은 의기와 지혜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서각은 영서(靈犀)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당나라 현종(玄宗) 때 교지국(交趾國)에서 황금빛의 서각 하나를 바쳐 왔는데, 그 사자(使者)의 청(請)에 따라 이것을 금반(金盤)에 담아 전중(殿中)에 놓아두자, 다스운 기운이 발산하므로, 황제가 그 까닭을 물으니, 사자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추위를 물리치는 서각입니다.(此辟寒犀也)”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이 일화를 통해 서각은 추위로 상징되는 고난, 고초 등을 이겨내는 결기로 상징화되었다. 또 『진서(晉書)』에는 “온교(溫嶠)라는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무창(武昌)의 저기(渚磯)에 당도하니 물이 아주 깊었는데 사람들이 모두들 물속에 괴물이 산다고 하였다. 이에 온교가 서각에 불을 붙여서 물속을 비추니, 얼마 뒤에 물속에 있던 기이한 모습의 물고기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라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를 통해 서각은 선비들에게 잘못된 것, 괴이한 것 등을 판별할 수 있는 지혜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한편, 서각(犀角)은 무기의 재료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일찍이 고려 시대 풍속을 담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백금(白金:은)과 오서(烏犀:검은 코뿔소 뿔)에 사이사이 어긋나게 해사어피(海沙魚皮:바다상어 가죽)를 섞어 칼집을 만들었다.”하였다. 또 서혁(犀革) 혹은 서갑(犀甲)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서(犀)를 재료로 만든 갑옷을 말하며 서궁(犀弓)은 서(犀)를 재료로 하여 만든 활로 다양한 무기의 재료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이와 관련된 신기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세조(世祖) 때 임금이 수도승을 화장하고 나온 사리를 얻었는데 제신들에게 보이자 어떤 사람이 시험 삼아 서각(犀角)으로 만든 칼자루 위에 올려놓자, 잠깐 사이에 다 녹아버린 것이다. 이에 세조가 깜짝 놀라 그 이유를 물으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무릇 사리란 음정(陰精)이 응결된 것이고 서각은 곧 남방(南方)에 있는 지극한 양물(陽物)이기 때문에, 음이 양에 의해 녹는 것입니다.”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서각은 귀한 약재로 활용되었다. 중국 동진(東晋:317∼419) 시대 학자인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서는 “코뿔소는 모든 풀의 독을 먹고 많은 나무의 가시를 먹어도 능히 해독시킨다.”라고 하였다.

『본초강목』에서는 “코뿔소는 서번(西番), 남번(南番), 전남(滇南), 교주(交州) 등지에서 산다.”라고 하며 그 약효에 대해 “성질이 차고 맛은 쓰고 시고 짜며(달고 맵다고도 한다.)독이 없다. 심신(心神)을 진정시키고 풍독을 흩는다. 사기와 귀신을 물리치고 악독한 기운에 맞은 것을 물리친다. 놀란 것을 멎게 하고 열독이 심에 들어간 것을 몰아낸다. 광언(狂言), 망어(妄語)를 치료한다. 간기(肝氣)를 누르고 눈을 밝게 한다. 산람장기(山嵐瘴氣:풍토병) 및 온갖 독을 풀어준다. 옹저와 창종(瘡腫)을 치료하여 고름을 녹인다.”라고 하였다. 『동의보감』에서도 심신을 안정시키고, 황달과 피부 발진 등에 유용한 약재로 활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서각은 위(胃)에 열(熱)이 많은 경우에 쓰는 가감감로음(加減甘露飮), 눈이 약화 됐을 때 쓰는 경효산(經效散), 편두통을 치료하는 궁서원(芎犀元) 등 다양한 처방에 적용됐다.

『승정원일기』 인조 24년(1646) 5월 17일에는 중전(장렬왕후)이 밥을 먹다가 토혈을 하자 서각지황탕(犀角地黃湯)을 진어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동의보감』에는 서각지황탕은 “생지황 3돈, 적작약 2돈, 서각(깎아서 가루 낸 것), 목단피 각 1돈을 썰어 1첩으로 하여 물에 달여먹는다. 코피나 토혈이 멎지 않는 것과 상초의 어혈로 얼굴이 누렇고 대변이 검은 것을 치료하고 어혈을 잘 없앤다.”라고 하였다. 숙종 9년(1683) 11월 6일에는 숙종이 목이 아픈 증세를 보이자 호박서각고(琥珀犀角膏)를 진어했는데 『동의보감』에서 “마음을 지나치게 써서 혀가 헐거나 버섯 같은 것이 돋을 때는 호박서각고를 써야 한다.”고 하였다. 또, 영조 2년(1726) 7월 5일에는 영조 임금에게 은진(癮疹:두드러기) 증세가 보이자 서각소독음(犀角消毒飮)를 올렸다고 하는데 『의휘(宜彙)』(1817)에 따르면 “반진(班疹:피부 발진), 은진 등의 증상에는 모두 효과가 있고, 단독(丹毒)에 아주 좋다. 서각소독음(犀角消毒飮)을 쓴다. 우방자 4돈, 형개 방풍 각 2돈, 감초 1돈을 물에 달인 다음 서각가루 1돈 5푼을 타서 복용한다. 3~4첩을 계속하여 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서각은 중풍 치료에 탁월하다고 알려진 우황청심원(牛黃淸心元)이나 열을 다스리는데 활용된 승마황련탕(升麻黃連湯) 등의 주요한 약재로 활용되었으나 현재는 개체 수가 급감한 코뿔소는 국제보호동물로 규정되어 약재로 사용하지는 못한다. 대신 우각이나 수우각을 사용하여 처방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너를 부러워했던가 (望汝知幾日)
드디어 때를 만나 이내 몸에 띠었노라 (乘時到此身)
앞에서 보기에는 별로 다른 모양 없으나 (瞻前無別樣)
뒤에서는 눈부시니 다른 사람 위함일세 (耀後爲他人)
얼룩무늬 등에 있어 안 보일라 (眼惜斑文背)
허리에 걸친 가죽 띠를 자주 돌려매노라 (腰旋皁革頻)
말에서 내리는 사람 연이어 만나니 (連逢下馬客)
비로소 위엄이 뛰어남을 알겠노라 (始覺異常倫)

- 이규보(李奎報:1168~1241)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 「처음으로 서대(犀帶)를 띠고」

  • 1)종정성(宗貞盛:1385~1452) 즉 소 사다모리는 대마도 소 씨(宗氏)의 제9대 당주이다. 1419년 조선이 군사를 보내 쓰시마를 정벌하려 하자 이에 맞서서 싸우기도 했다. 전후에는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노력하고 1441년에는 조선 근해에서 쓰시마 어부들이 어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조약을 조선 측과 합의하여 사실상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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