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초등학교,
헌책방으로 변신했어요
전남 순천 낙안면에는 폐교된 초등학교를 책으로 되살린 특별한 서점이 있다. 누군가의 손을 거치고, 또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인 헌 책들이 오래된 교실과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다. 형설서점을 지키고 있는 조순익·차현숙 부부는 헌책에 담긴 이야기뿐 아니라 헌책을 거쳐온 사람들의 사연까지 소중히 여긴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중했던 책이잖아요. 그 가치가 또 다른 이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40년 넘게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981년 광주 대인동에 처음 문을 연 형설서점은 순천 시내를 거처 지금의 낙안면에 자리를 잡았다. 반딧불로 붉을 밝히고, 새하얀 눈빛에 비추어 책을 읽었다는 고사성어 형설지공(螢雪之功)처럼 형설서점은 책을 향한 간절함으로 오랜 세월을 버텼다. 조순익 대표는 형설서점에서 굳이 책을 사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다. 대신 빼곡한 책장 사이를 보물찾기하듯 천천히 둘러보길 바란다. 그 안에서 일상에서 잊고지낸 추억과 재미, 여유를 찾는다면 헌책방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고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형설서점이 40년을 넘어 100년 이상 대대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출판·서점 시장은 시대에 따라 빠르게 변화한 분야 중 하나입니다. 그런 면에서 40년 이상 명맥을 이어온 형설서점이 더욱 대단하게 다가오는데요. 어떻게 출발해 지금까지 이어왔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화장품 방문판매를 하시던 어머니가 지인분을 통해 헌책방 운영에 대해 듣고는 광주 대인동에 책방을 차렸어요. 3평쯤 되는 작은 공간에 형설서점 간판을 달고 시작한 게 1981년이죠. 형님이 함께 운영했는데 제 고등학교 졸업 무렵 서점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군대에 가버렸어요. 자연스럽게 제가 어머니 책방을 돕게 된 거죠. 그러다 진주에서 직장생활도 잠깐 하고, 헌책방 도매상도 하다 안동에 가게가 났다고 해서 덜컥 계약해 1987년 안동 형설서점을 열기도 했습니다. 잘 꾸리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광주 생활을 접고 순천으로 간다는 거예요. 제 손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어머니와 순천에 내려와 책방을 다시 꾸린 게 1989년, 순천에서 쭉 이어오다 2017년 폐교된 옛 낙안남초등학교에 자리를 잡고 지금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헌책방이라는 공간 자체가 낭만과 추억이 깃들기 마련인데, 옛 초등학교에 자리를 잡아 운치가 더욱 돋보입니다. 어떻게 폐교를 활용하게 되었나요?
지금 보유한 책만 어림잡아 30~40만 권이거든요. 헌책의 가치가 더 돋보일 수 있도록 헌책 박물관을 만들고 싶었어요. 폐교를 활용하며 좋을 듯해서 발품을 팔아 알아보러 다녔는데 구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우연히 경매로 학교가 나온 걸 본 거죠. 직접 와서 현장을 본 순간 ‘이건 내 거다’ 싶더라고요. 여기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 6개월 정도 지켜보다 2017년 낙찰받아 서점으로 꾸렸습니다.
덕분에 시골의 개성있는 헌책방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형설서점이 추구하는 모습은 무엇인가요?
6개 학급의 교실에 책이 빼곡하게 찼는데요. 옮기는 데만 석 달이 걸렸고, 2년 동안은 동네 사람들이랑 어울리느라 바빴어요. 처음에는 책 박물관을 계획했지만 지금처럼 책 사이를 자유롭게 둘러보는 게 더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보물찾기하듯 탐색하는 재미도 있고, 우연히 좋은 책을 만날 수도 있고요. 누구든 문 두드리고 찾아오는 곳, 가족끼리 나들이 장소로 찾아올 수 있는 편안한 책방이 되고 싶습니다.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40년을 관통해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책방 풍경도 많이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1980년대 초, 광주 계림동·대인동 일대에만 헌책방이 100곳 정도 있었어요. 책이 귀한 시대로 대부분이 참고서나 교재였지요. 학교 앞에서 전단지를 뿌리며 책을 구했고, 청계천에서 해적판을 떼어와서 팔기도 했습니다. 20대 초반, 젊은 친구가 헌책방을 한다고 하니 다들 잘 챙겨줬어요. 이름 대신 ‘형설’이라고 불렸죠. 지금은 고물상을 통하거나 기관·개인의 처분, 도서관 기증 등을 통해 책을 수급하죠. 이제는 일반서적이 대부분인데 저희 서점은 소설보다는 인문학, 역사, 철학, 사회 과학 서적의 비중이 좀 더 높은 편이에요. 책을 고를 때는 팔릴 수 있는 책인가, 누군가에게 필요한가를 먼저 따지죠.
헌책방 운영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책을 구입할 때 기분이 참 좋아요. 헌책에는 삶이 보이거든요. 누군가가 귀중하게 살아온 삶을 만나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려요. 80~90년대 책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안 본 책이 나타나면 짜릿하고요. 늘 ‘이 귀한 책이 초라한 나에게 오다니’라며 감사한 마음이에요. 팔기 싫은 책도 있다니까요. 안동 형설서점에서 일본어로 독립군을 포박하는 방법을 적은 책이 있었는데 사학과 교수님이 몇 년 공을 들여 사 갔어요. 그 책은 지금도 아쉬움이 남아요.
기억에 남는 고객이 있을까요?
한번 와서 대량으로 사가는 고객보다 일주일에 한 번이든 한 달에 한 번이든 정기적으로 오는 분들이 더 반갑죠. 늘 꾸준히 찾아주신 어르신이 계셨는데 언젠가부터 발길이 없더라고요. 그러다 어르신 손주로부터 책을 처분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가니 어르신은 세상을 떠나고 그분 방에 저희 서점에서 구입한 책이 빼곡했습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뭉클한 감정이 올라오더라고요. 지금도 시큰하네요.
같은 책이지만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더 특별한 의미를 더하는 게 헌책의 매력 같은데요. 앞으로 형설서점을 어떻게 발전시킬 계획인가요?
일단은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이 많은 책이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가치있는 책으로 돌아가면 좋잖아요. 현재 학교 안에 목공방과 연희나래 독아지 국악공연팀이 입주해 있습니다. 이곳을 책도 만나고, 공연도 하고, 전시도 여는 공간으로 키우고 싶어요. 꼭 제 자녀가 아니더라도 형설서점의 가치를 오래 이어갈 수 있는 분에게 대를 이어 남겨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책과 함께 누구나 쉬고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100년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 주소 | 전남 순천시 낙안면 이곡1길 12
· 전화 | 061-741-1069
· 영업시간 | 09:00~18:00 (책 수거 시 자리를 비울 수 있으니 방문 시 미리 전화 요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