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상담

<29> 세종 “의원은
수의학도 공부하라”

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예조에서 아뢰었다.
“『우마방서(牛馬方書)』를 전의감 의원으로 하여금 모두 익히게 하고, 사복시의 마방(馬方)을 혁파하고 습독(習讀)하던 권지직장(權知直長)은 각 관사(官司)의 권지(權知)로 나누어 소속시키소서.”
이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2월 6일

조선 시대 약방(藥房)이나 약원(藥院)으로 불리던 내의원(內醫院)이 임금을 비롯한 이하 왕족과 궁중에서 쓰이는 약을 조제하던 관청이라면 전의감(典醫監)은 왕실전담 의료행정기관이었다. 따라서 전의감의 주요 업무는 임금이 내리는 하사(下賜) 의약품 관장, 궁중에 의약품 공급, 의학 교육과 의원 선발 등이었다. 물론 부가적으로 관료의 진찰, 약의 제조, 약재 재배도 하였다. 전의감에는 의학서적에 정통한 문신을 키우기 위한 관직인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을 두기도 하였다. 인원은 세종 때 15명에서 세조 때 30명으로 늘었는데 이들 중 성적이 좋은 사람은 현관에 임용됐다.

그런데 세종은 이 전의감 의원들에게 수의학 전문서적인 『우마방서(牛馬方書)』를 공부하게 한다. 사람을 치료하는 의원에게 동물을 다루는 수의학도 익히게 한 것이다. 세종이 학습서로 삼게 한 『우마방서』는 정종 1년(1399)에 권중화(權仲和), 한상경(韓尙敬),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 방사량(房士良)등이 함께 쓴 『신편집성마의방우의방(新編集成馬醫方牛醫方)』이다. 권근(權近:1352~1409)의 『양촌집(陽村集)』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경험한 방문을 채집하여 부문으로 분류 편집하여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이라 이름하고, 『우마의방(牛馬醫方)』을 부록(附錄)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 『우마의방』의 정식명칭이 바로 『신편집성마의방우의방』이었다. 이 책은 원의 『마의방(馬醫方)』을 참고, 고려의 수의서인 『동인경험방(東人經驗方』을 활용해 편찬된 이 책은 고려의 수의학 지식과 송나라, 원나라에 행해진 소와 말의 치료법을 집대성한 책이다.

전통시대에 말과 소는 국가경쟁력이었다. 말은 전투력의 기준이고, 소는 농업생산력의 바탕이다. 군마(軍馬)와 식용, 농업과 연관된 말과 소는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마부(馬部)를 독립관서로 두었고, 고려는 사복시(司僕寺)를 두어 마정(馬政)을 담당하게 했다. 고려의 전통을 이은 조선도 사복시에서 말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다. 또 병든 말을 치료하는 마의(馬醫)를 두었다. 마의는 말의 혈 자리에 침을 놓고, 변증에 따라 한약을 처방했다.

세종 때 마의의 중요성은 명나라와의 말 교역으로 더욱 커졌다. 조선은 여러 차례 명나라에 말을 수출했는데 오랜 기간 여행 끝에 요동에 도착한 말은 급격한 환경 변화에 따라 폐사하거나 삐쩍 마르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에 명나라는 질이 떨어지는 말의 수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말의 생장과 질병 등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마의는 사복시에 10명이 있었다. 조선의 법령자료인 『대전통편(大全通編)』을 보면 “마의(馬醫)는 병조에서 사복시제조(司僕寺提調)와 함께 강서(講書) 시험을 보인다. 강서(講書)는 (마의서(馬醫書)의 하나인) 『안기집(安驥集)』으로 한다. 책을 펼쳐 놓고 두 곳을 강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이러한 마의 제도가 체계화되지 않았다.

태종은 13년(1413) 8월 6일 백성의 치료를 담당한 혜민국의 의원 4명을 사복시로 보내어 말의 특성 연구와 질병 치료를 하게 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자 세종은 9년에 대궐에서 근무하는 전의감 의원에게 『우마의방서(牛馬醫方書)』를 공부시켜, 수의사로도 활동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이는 전의감 의원 몇 명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사복이마(司僕理馬)등에게 의방(醫方)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약을 쓰고 침을 놓는 것을 모두 억측으로 하옵니다. 청컨대, 사복시에 속한 의원으로서 할 만한 사람 2인을 뽑아서 한 체아직(遞兒職)을 주고, 여러 인원에서 말을 기르고 다스릴 연소(年少)하고 영리한 사람을 골라서 두 의원에게 나누어 붙여서 마의방(馬醫方) 및 경험한 약명과 치료하는 술법을 전습(傳習)하게 하되, 글자를 모르는 자에게는 말로 해석하여 가르치며, 그 의원의 능하고 못함은 본시(本寺)의 제조가 그 가르침을 받은 자와 말의 병을 치료한 것이 많고 적은 것을 해마다 초(抄)하여 계문(啓聞)해 녹용(錄用)하며, 그 전습한 사람은 다스리고 치료한 것이 가장 많은 자를 녹용하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 6월 22일

이마(理馬)는 사복시에서 말의 훈련과 치료를 담당하던 직책이다. 『세종실록』의 위 기록에 따르면 마의방(馬醫方)을 가르치지 않아 사복시의 이마(理馬)들이 마음대로 약을 쓰고 침을 놓았다. 그러자 병조에서는 젊고 머리 좋은 마부에게 마의방의 약명 및 치료술을 공부시키고, 능력 있는 자는 마의로 임용하며, 또 해마다 말의 병증과 치료 방법 등을 기록해 훗날 활용하게 할 것을 주청한다. 세종은 이를 윤허하여 치료의 길을 넓힌다.

세종의 이러한 뜻을 받든 아들 세조는 1466년 4월 14일 마침내 서거정에게 『마의서』를 편찬하게 한다. 일찍이 마정(馬政)에 관심 많았던 세조는 말을 키우고 다스리는 법을 여러 신하와 군사에게 물었고, 모두가 경험하고 들은 이 이야기들을 서거정에게 정리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 편찬된 『마의서』에는 세종 때부터 쌓여온 경험과 기록들이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종 36년(1541) 봄, 평안도에서 시작된 우역병(牛疫丙)이 다른 도에도 전염되어 폐사한 곳이 많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양이나 돼지 등도 경외(京外)에서 역병에 전염되어 죽은 것이 또한 많아지자 조정에서는 이를 구제하는 한편, 관련 서적을 편찬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이다. 이 책은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이두와 한글로 된 해석이 달려 있고, 약명 또한 향명으로 쓰여 있다.

조선 초기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던 마의(馬醫)는 성종 때 정립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되면서 비로소 종9품의 마의 10명이 사복시에 소속되어 잡직을 받게 되었고, 종6품(從六品)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혜민국, 전의감 의원도 필요에 따라 말의 질병을 같이 연구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마의 제도는 더욱 안정됐다. 영조 때 완성된 『속대전』에 의하면 정3품의 마의 3명, 이마(理馬) 4명이 증설된 것이다.

태종, 세종 시대에 의원이 말의 치료법을 연구한 것은 한방의 치료 원리 덕분으로 볼 수 있다. 몸과 마음이 자연스러우면 인간이나 동물이나 질병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크다. 또 말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침이나 약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한의학은 자연에 순응하는 동시에, 자연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치료법이다. 사람이나 말이나 크게 보면 자연의 한 구성원임을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부작용은 최소화 시키면서, 치료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임을 알았다.

마의(馬醫) 윤중년(尹仲年)은 말에 대한 의공(醫工)이 자못 뛰어날뿐더러 사람의 안질을 치료하는 데 신묘하였다.
그는 “말의 병은 사람의 병과 같아 간으로써 간을 치료하고 폐로써 폐를 치료하고 지라로써 지라는 치료하니 오장이 다 그러한데 눈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안정(眼精)으로 안정을 치료하기 때문에 백 번을 시험해 봐도 낫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제비는 항상 공중에 날면서 여러 가지 벌레를 잡아먹는데 벌레 몸둥이는 소화가 되어버리나 안정만은 소화가 되지 않으므로 나는 제비 똥을 많이 모아 깨끗이 씻으니 더러운 찌꺼기는 없어지고 안정만이 남았다. 온종일 해도 터럭 정도에 불과하였는데, 이것을 찌어 약에 타서 병이 난 눈에 넣었더니 눈은 자연히 신통한 효과가 있었다.” 하였다.

- 이륙(李陸:14381498), 『청파극담(靑坡劇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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