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후로는 약재(藥材)의 들어오고 나가는 것 이외에 비록 대언(代言)이라도 내약방(內藥房)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2월 9일
세종 5년(1425), 세종의 귀에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입국한 뒤 이질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은 개성에서 치료 중인 사신에게 이질 약품을 보낸다.
이질은 감염성 대장염의 일종으로 시겔라(Shigella)균이 대장과 소장에 침범해 복통, 설사, 혈성 설사, 점성 설사, 발열, 잔변감 등을 일으키는 1종 법정 전염병에 해당이 된다.
그 당시에도 설사와 이질은 구분되었다.
이질은 주로 날씨가 따뜻한 계절에 시작돼 가을까지 영유아와 성인에게 발생하는데 여느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비위생적 환경이 큰 원인이다. 식수, 음식, 오물 등을 다루는 손발의 위생에 소홀하면 걸릴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과 비교해 조선을 비롯한 옛 시대는 공중 및 개인위생이 매우 열악했다. 이로 인해 효종 6년(1655) 10월에는 함경도 북청에서 이질이 발생해 150여 명, 현종 9년(1668) 8월에는 충청도 덕산에서 100여 명이 죽기도 하였다.
이질은 비록 왕족과 고관들이라도 피하지 못했다. 정종은 즉위 1년(1399) 5월부터 3개월 동안 이질을 앓았고, 태종 또한 11년(1411) 7월 2일 조회 때 신하들의 보고를 받지 않았다. 신하들에게 이질이 전염될까 염려한 까닭이다. 15년(1415) 6월 24일에는 이질이 심해 종친들과 대신들이 입궐해 문안을 올렸다.
세종의 이질 병력 역시 『세종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종은 7년(1425) 윤7월 10일에는 이질로 인해 명나라 사신 접견을 연기한다. 여러 날 이질로 힘들어한 임금은 사신에게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전한다.
세종은 보름 뒤에 사신을 따라 온 요동의 의원 하양(河讓)으로부터 진찰을 받는다. 진단은 ‘과로로 인해 상부(上部)는 성하고, 하부는 허(虛)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처방문을 써주었으나 우리의 의서에 보이지 않아 이를 먹진 못했고, 대신 그 이전에 죽엽석고탕(竹葉石膏湯)을 먹는 것은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아마도 이를 마셨을 것이다. 『동의보감』에서 죽엽석고탕은 “상한이 나은 후, 남은 열이 있거나 양명증(陽明證)에 땀이 나고 갈증이 있는 경우 또 허번(虛煩)이 있는 경우를 치료한다.”고 하였다.
이질을 예방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손의 위생으로 음식 섭취 시, 용변 전후 등 손을 깨끗하게 씻는 게 효과적이다. 허준은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에서 “도랑의 물이 빠지지 않아 더러운 오물이 씻겨나가지 못하면 훈증(薰蒸)되어 온역이 생긴다.”고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단방비요(單方祕要)경험신편(經驗新編)』에서는 “이질을 전염시키는 매개물은 이질 환자의 대변이므로 완전히 소독을 하여 예방에 주안점을 둔다. 또, 음식이나 식기에 주의하고 생수를 경계한다. 환자의 더럽혀진 옷을 우물가에서 빨거나 요강의 더러운 오물을 하천에 버리는 악습을 엄중히 금해야 한다. 마시는 물의 오염을 예방하고 이외에 감기를 조심하며 장위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 반드시 중요하다.”고 하였다.
한의학에서는 이질의 원인을 외적인 요인을 일컫는 감수외사(感受外邪), 정신적 충격인 내상칠정(內傷七情), 음식으로 인한 식음소상(飮食所傷), 비(脾)와 신(腎)의 허약 등으로 본다. 또한 이질은 원인에 따라 종류를 나눌 수 있는데, 소장으로부터 온 습열이 원인이 되어 설사증세가 있는 적리(赤痢), 대장으로부터 온 습열이 원인으로 흰 곱똥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백리(白痢), 냉기와 열기가 고르지 않아 설사가 잠깐 왔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 적백리(赤白痢), 오한이 있고 대변에 고름이 먼저 나오다가 피가 나오는 농혈리(膿血痢), 게거품 같은 설사를 하고 뱃속이 유난히 심하게 당기는 기리(氣痢) 등으로 표기했다. 특히 『동의보감』에서는 이 중 역리(疫痢)에 대해 “한 지방, 한 가족(一方一家)내에서 상하(上下)에 전염된다. 어른이나 아이 구분 없이 증상이 비슷하다.”고 하여 인삼패독산(人參敗毒散)에 진피ㆍ백작약을 넣어 달여 먹거나 강다탕(薑茶湯)으로 예방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처방은 주로 침습된 장의 해로운 내용물을 제거하거나 기운을 조절, 혈(血)을 조화롭게 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 『동의보감』에는 수자목향고(水煮木香膏), 육신환(六神丸), 향련환(香連丸), 백출안위산(白朮安胃散), 백중산(百中散), 화중음(和中飮), 이간단하탕(易簡斷下湯), 영위산방(寧胃散方), 구명연년환(救命延年丸)을 이질을 두루 치료하는 약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 이밖에도 도적지유탕(導赤地楡湯), 가감평위산(加減平胃散), 지유산(地楡散), 고장환, 온육환(溫六丸), 강묵환(薑墨丸), 수련환(茱連丸), 소주거원(小駐車元), 황련아교원(黃連阿膠元), 사백안위음(瀉白安胃飮)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영, 정조 시대의 지방의원인 허초객, 허초삼 형제가 쓴 『진양신방(晋陽神方)』에는 창름산(倉廩散)에 대해 “적백리로 계속 열이 나는 것을 치료한다.”고 하였으며 “문짝이 열려있듯이 설사를 하는 구금리에 복용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삼패독산(人參敗毒散)에 황련 묵은 쌀 30알, 생강 3쪽, 큰 대추 2개를 더하여 달인 것이라고도 하였으며 설사 후에 손발이 아프면 빈랑을 더하고, 구금리에는 묵은 쌀과 연육 7개를 더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홍국영이 처방하고 정조가 복용한 창름산은 인삼패독산에 다른 재료를 넣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삼패독산은 이미 『동의보감』를 비롯한 많은 의서에서 이질에 좋은 약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강활(羌活), 독활(獨活), 시호(柴胡), 전호(前胡), 지각(枳殼), 길경, 천궁, 적복령, 인삼, 감초를 각 1돈씩 썰어 1첩으로 하여 생강 3쪽, 박하 약간을 넣어 물에 달여 먹는다고 하였다.
- 『일성록(日省錄)』, 정조 18년(1794) 10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