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정선공주의 산후풍과 산후우울증 처방
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2월 2일
아버지 태종이 돌아가신 후 불과 2년이 지난 1426년 세종에게 또 하나의 불행이 찾아온다. 그해 1월 25일 여동생 정선공주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녀의 나이 불과 21세였다. 세종은 여동생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수라를 물리며 조회를 3일 동안이나 정지하였다. 그녀는 슬하에 1남 1녀를 남겼다. 세종은 아직 어미를 잃은 그 어린 조카들 또한 걱정이었다. 그 모든 마음을 담아 세종은 정선공주를 기리며 제문을 써내려 나간다.
몸이 약한 탓에 태종의 애를 유난히도 태웠다는 정선공주(貞善公主)는 조선 왕조의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여인이다. 물론 그녀 자신이 아니라 그녀와 연관된 인물들로 인해 역사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첫째, 그녀는 조선 최초의 부마 간택제도로 남편을 맞이하여 혼례를 올린 왕녀였다.
정선공주는 세종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4남 4녀를 두었는데 왕자로는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충녕대군), 성녕대군이 있고, 공주로는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가 있었다. 이들 중 세종은 여섯째였고, 정선공주는 일곱째였다. 그러니 세종의 애달픔이 더했을 것이다. 제문에 의하면, 그녀는 아름다웠고, 성품도 정숙(靜淑)하고 곧으며, 행실 또한 공손하고 착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태종은 막내딸의 편안한 시집 생활을 원했다. 이에 태종은 ‘4~5품 이하 사부(士夫) 가문의 아들’이라는 조건을 내걸기까지 하였다. 『태종실록』 태종 15년(1415) 11월 6일에는 이와 같은 정황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그 위 세 명의 공주에 비해 낮은 가문의 사람이 공주의 배필이 되는 것에 대해 조정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여러 판서에게 굳이 벼슬이 낮은 집을 고른 연유에 대해 태종이 직접 설명하고 나선 것이다. 태종은 외척의 발호를 극히 경계하였었고, 심지어 세종의 장인이었던 심온(沈溫)마저 불경죄를 물어 죽이기까지 하였었다. 그래서인지 태종의 말처럼 권신 집안에서 들인 부마들 역시 그 화를 피하진 못했다. 그만큼 공주들 또한 마음고생이 심했을 터다. 하지만 자신의 막내딸만큼은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태종은 굳이 낮은 집안의 사위를 간택한 것이다. 그렇게 선택된 인물이 영의정 남재(南在)의 손자였던 남휘(南暉:?~1454년)였다. 그는 비록 정승의 손자였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점에 주목했다. 그러므로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 이전처럼 정변에 휘말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교만하고 방종하지도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태종의 예상은 빗나가곤 만다. 남휘는 놀이에 빠져 공주를 돌보지 않았고, 또한 다른 여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의산군(宜山君) 남휘가 죽은 칠원 부원군(漆原府院君) 윤자당(尹子當)의 첩 좌군비(左軍婢) 윤이(閏伊)를 간통하다가, 어느 날 윤이가 4촌 언니의 집으로 돌아가니, 휘가 질투하고 또 노해서 그 집으로 쫓아가서 언니 되는 여자와 그의 남편을 구타하여 거의 운명(殞命)하기에 이르게 하였다.
임금이 듣고 휘를 불러 꾸짖기를,
왕실에 관련 있는 자는 마땅히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무슨 공덕이 있어 이런 부귀를 누리나.’ 하고 더욱 경계하고 근신하여 편안하고 영화로움을 보전할 것이어늘, 너는 무술년(1418)에 조정의 관원을 구타하여, 헌부에서 소를 올려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내가 관대하게 용서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임인년(1422)에 공주가 병이 나서, 내가 진념(軫念)하여 사람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였는데도, 너는 병증세가 어떠한지 알지도 못하고 내시를 데리고 쌍륙(雙六)만 치고 있어, 조금도 가장(家長)된 도리가 없었다. 또 윤자당(尹子當)의 비첩(婢妾) 윤이는 남편의 거상을 입고 있는지 백 일도 못된 것을 첩으로 삼았으니, 비록 상가(常家)의 처첩(妻妾)이라도 그렇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늙은 공신(功臣)의 첩이란 말이냐. 이제 또 죄도 없는 사람을 구타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 그렇게도 광패(狂悖)함이 심하냐. 네가 집으로 돌아가서 내 명령이 있지 않으면 비록 이웃이나 동네라도 출입하지 못한다.
-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7월 2일
이처럼 공주의 결혼 생활은 불운했다. 쌍륙 놀이에 중독된 남휘는 공주가 병이 깊어지는 상황에서도 상태도 살피지 않고, 간호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성격도 난폭해 사람을 때리기를 여러 번이었으며 공주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다른 여인을 첩으로 삼으니, 화가 난 세종은 그에게 금족령까지 내리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선공주는 그녀의 손자들로 인해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그녀의 손자가 바로 불과 27세에 병조판서에 올랐다가 훗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된 남이(南怡:1441~1468)장군이며, 정선공주와 남휘 사이 딸은 신자승(申自繩)의 처가 되었는데 그의 증손녀가 바로 신사임당이며, 그녀의 아들이 바로 율곡 이이(李珥)이다.
한편, 정선공주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것은 산후병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선공주는 15세에 초야를 치른 뒤 17세쯤에 첫 아이를 낳았다. 이 무렵에 어머니 원경왕후가 승하하고, 2년 후에는 아버지 태종도 승하했다. 공주는 출산과 함께 부모를 기리는 상례에 충실해야만 했다. 음식 섭취와 생활이 힘겨워졌을 것이다. 부모를 여윈 정신적 충격과 약해진 몸, 그리고 그 와중에 출산은 산후 우울증의 호발 요건이다.
『세종실록』에 공주가 ‘우연히 병을 얻었다.’고 기록된 것임을 보면 이는 특별한 질병보단 정신과 몸의 쇠락이 겹치며 서서히 병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이 무기력한 상태인데 남편마저 들어오지 않고 놀이에만 빠져 있었으니 공주는 더욱 우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제문에 나오는 것처럼 ‘백약이 무효’일 수밖에 없었을 터다.
여성에게 출산은 축복이다. 그러나 일부 여성은 관절통, 부종 등과 함께 심각한 우울증을 겪게 된다. 270여 일의 임신은 육체적 에너지를 고갈시킬 뿐만 아니라 극심한 정신적 피로를 부른다. 출산 무렵에는 릴랙신(relaxin) 호르몬이 분비되어 골반이 확장되는 반면에 관절과 인대 조직이 느슨해지는데 이는 출산을 전후하여 관절이 약해짐을 의미한다. 또 출산 시 다량의 출혈, 출산 후 호르몬 변화와 육아 스트레스는 심리적 불안과 체력 약화를 더 가속화 한다.
이와 같은 요인이 겹치면 산후 우울증이 나타난다. 출산 후 우울증은 2~3개월 후에는 대부분 사라지지만 일부는 호르몬 이상 등과 맞물리며 증세를 더욱 부추긴다.
한의학에서는 출산 후 관절약화, 피로감, 식은땀, 우울감, 부종, 통증, 빈뇨, 잔뇨감, 구토, 오심, 변비, 수면장애, 상열감, 오한, 설사, 소화불량 등의 증상을 산후풍(産後風)이라고 한다. 산후풍은 산후조리가 충실하지 못한 탓으로 발병한다. 출산 전후 약화 된 몸은 충분한 영양섭취, 몸의 어혈 제거, 관절 보호, 혈액순환 촉진 등의 적절한 산후조리로 회복된다.
『동의보감』에서는 산후조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이를 낳은 지 1달이 안 되어 칠정이 과하거나 과로를 하거나, 바느질하거나 생 것, 찬 것, 끈끈한 것, 딱딱한 것을 마음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풍한(風寒)에 상하면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나 그 후엔 곧 욕로(?勞:산후병)가 된다. 아이를 낳은 지 100일이 지나야 성교할 수 있다. 100일 전에 성생활을 하면 죽을 때까지 허약하고 마르며 온갖 병이 생기니 조심해야 한다.
분만 후 기혈이 손상된 상태에서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관절 혹은 경락과 기육(肌肉) 사이가 어혈(瘀血)이나 풍한의 사기로 막힐 수 있다. 그런 상황이 지속 되면 몸에 통증이 발생하는데 『동의보감』에서는 그 증상에 대해 “허약하고 여위며, 일어났다 누웠다 하고 음식이 소화되지 않으며, 때로 기침하고 머리와 눈이 혼미하며 아프고, 갈증이 나며 도한이 있고, 학질처럼 한열이 왕래한다.”고 하였다.
산후풍의 예방과 치료에는 한약 처방이 가장 중요하다. 탕약은 혈허형(血虛型), 풍한형(風寒型), 신허형(腎虛型), 혈어형(血瘀型) 등의 유형에 따라 처방이 달라진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산후에는 우선 기혈을 크게 보해야 하니 보허탕(補虛湯)을 쓰고, 여러 가지 증상이 있더라도 나중에 치료한다.”고 하였는데 이처럼 공통으로 기력과 혈을 보하고, 어혈을 제거하는 방법을 쓴다. 또 증상에 따라 소염작용이 있는 약재가 더해진다. 많이 처방되는 약은 인삼, 백출, 당귀, 천궁, 황기, 진피, 감초가 들어가는 보허탕(補虛湯)을 비롯해, 필요한 경우 어혈 제거를 추가하기 위해 당귀, 천궁, 도인, 건강, 감초 등이 들어가는 생화탕(生化湯), 궁귀탕(芎歸湯) 등이 있다. 그런데 현대에는 영양상태가 좋으므로 출산 후 기혈을 보하기보다 어혈제거를 더 주안점을 둔다.
『선조실록』에는 선조 36년(1603) 5월 24일 정명공주를 낳은 후 산후풍으로 고생한 중전을 위한 약치와 식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옥후가 점점 회복되어 가시니 오늘은 앞서 가미해 드린 궁귀탕(芎歸湯)을 계속 드시고, 다시 옥후가 어떠한가를 살펴보아 다시 다른 약을 쓰도록 의논하거나 정지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다만 여의(女醫)를 통해 삼가 듣건대, 내전께서 수라를 들기 싫어하신다고 하니, 이는 필시 위장의 기능이 약화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의관들과 상의해 보니 ‘산후에는 약만 써서는 안 되고, 누런 암탉을 푹 삶아 즙을 내어 죽을 만들거나 붕어를 달여드시면 위장을 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대로 만들어서 드시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 기록이 있기 전 이틀 전인 5월 22일 기록을 보면 중전에게는 자금환(紫金丸)에다 오령지(五靈脂:날다람쥐 똥)와 몰약(沒藥)의 약재를 넣은 약이 처방되었다. 자금환과 오령지, 몰약은 모두 어혈을 풀고 통증을 멈추게 하는 약이다. 당귀와 천궁 두 약재를 넣어 만든 궁귀탕은 『부인대전양방』에서 출혈이 생긴 것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약재로 산후에 어지러우면 작약을 넣어 복용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였으며, 『동의보감』에서도 산후에 피를 많이 흘릴 때 사용한다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24년(1646) 11월 8일에도 세자비가 아이를 낳은 후 어혈로 배가 아픈 증세를 보이자 궁귀탕을 처방했으며 여기에 도인(桃仁:복숭아씨를 찧은 것), 주홍화(酒紅花), 삼릉(三稜), 봉출(蓬朮), 오령지(五靈脂), 통째로 검게 구운 건강(乾羌[薑])을 더했다고 한다. 또한 『동의보감』에서는 누런 암탉과 붕어 모두 오장을 보호한다고 하였음을 볼 때 왕실에서도 출산 시 몸을 보하는 식치음식을 올렸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 『승정원일기』 인조 26년(1648) 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