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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41) 간질병과 사회적 배려
경상도 곤양 사람 진겸의 아비가 간질(癎疾)로 고생하였다. 진겸이 손가락을 잘라 태워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 아비에게 먹였더니 즉시 나았다. 그 사실이 나라에 보고되자 관직을 제수했다.
- 『세종실록』 세종 21년(1439) 10월 4일 -
초기의 『조선왕조실록』에는 간질에 관한 기록이 몇 차례 등장한다. 하나같이 아들이나 딸이 간질을 앓는 부모를 위해 무명지(無名指)를 끊어 치료한 사연이었다. 나라에서는 그때마다 효자 효녀로 정려(旌閭)하였다. 태종 때는 평안도 안주에 사는 조존부(趙存富)의 효행을 선양하였는데 12살 어린 나이인 그는 무명지를 잘라 술에 타 어머니의 간질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세종 때는 경상도 사람 진겸(陳謙)이 단지(斷指)로 관직을 얻었고, 단종 때는 열네 살 경주(慶州) 사람 허조원(許調元)이 아버지가 오랫동안 간질을 앓아 역시 단지를 하였고, 평안도 안주(安州)의 향리(鄕吏) 오유린(吳有麟) 역시 아버지 치료를 위해 왼손 무명지를 잘랐다. 그런데 어머니도 간질에 걸리자 이번엔 오른 손가락을 잘라서 약을 지어 바쳤다고 한다.
조선은 유학을 국시로 내세웠다. 유학의 핵심 사상 중 하나는 바로 효도이다. 비록 사람의 손가락으로 간질을 치료하는 것이 의학적 근거가 없는 사술(邪術)이긴 해도 그것을 효심의 행위로 포상하였는데 이러한 포상은 드물긴 하지만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일성록(日省錄)』 정조 23년(1799) 6월 6일 기록을 보면 대구 사람 서명보(徐命普)는 아버지가 간질에 걸려 24년 고생하는 동안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는 등 효성을 다하였는데 이에 증직(贈職)하는 포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간질은 뇌 신경세포가 일시적으로 과도한 흥분 상태를 유발함으로써 의식 소실, 발작, 행동 변화 등과 같은 뇌 기능의 일시적 마비 증상이 만성적,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뇌 질환을 의미한다. 의학용어로는 뇌전증이라고 한다. 간질은 생후 1년 이내 가장 많이 일어나고, 청소년기와 장년기에 이르면 발생률이 떨어지다가 노년층에서 다시 증가하는 형태를 보인다.
원인은 유전, 두부외상, 뇌졸중, 뇌종양, 선천기형, 뇌염, 퇴행성 뇌병증 등 뇌의 병리적 변화로 파악된다.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항경련제와 같은 약물, 수술 등이 있다.
한의학에서는 간질인 뇌전증의 원인을 풍사(風邪)나 서사(暑邪), 역려지사(疫癘之邪)로 보았다. 유행성 감염질환으로 인한 고열로 신경에 손상이 와서 오는 열경련도 이에 해당한다. 또 담음(痰飮:몸 안의 진액이 제대로 순환되지 못하여 만들어진 물질)의 정체로 인해 기(氣)의 통로가 막히는 것도 요인이다. 아기는 심하게 놀라도 불안과 뇌신경 경련이 일어날 수 있다. 외상으로 인한 어혈(瘀血)도 뇌신경 교란과 혈맥을 막아 경련을 유발한다.
선천적 원인인 태간(胎癎)도 그 원인으로 거론된다. 태간은 산모가 심한 충격을 받으면 태아의 간과 심장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 전질(癲疾)로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도 그 병명을 태병(胎病)이라고 하여 "어머니의 복중에 있을 때 그 어머니가 놀람으로 기(氣)가 위로 상승한 후 하강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며, 정기(精氣)가 함께 거(居)하므로 자식이 날 때부터 전질을 앓는다"라고 하였다. 이런 태중에 생긴 충격은 간질로 발전하지 않더라도 유아의 사두증, 단두증, 사경증, 안면비대칭 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의학강목(醫學綱目)』에는 "담이 횡격막 위로 넘치면 심하게 어지러워 쓰러지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이를 전간(癲癎)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동의보감』에서는 "심기(心氣)의 부족으로 가슴에 열이 쌓여서 생긴다. 사실은 담과 열이 서로 부딪쳐 풍이 불고, 풍과 심(心)이 서로 뒤섞여 답답하고 어지러워진다. 그래서 풍현(風眩)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대개 치료는 뭉친 담을 삭이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등 원인에 따라 달리 처방을 한다. 『동의보감』은 용뇌안신환(龍腦安神丸), 오생환(五生丸), 추풍거담환(追風祛痰丸), 소단환(燒丹丸), 가미수성원(加味壽星元), 인신귀사단(引神歸舍丹), 청심곤담환(淸心滾痰丸)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간질은 기본적으로 난치병이기에 치료가 쉽지는 않다.
중종 때 우의정 권균(權鈞)의 사직상소에는 치료법과 치료의 어려움이 담겨 있다.
신은 오랜 질병인 간질(癎疾) 때문에 해마다 침을 맞고 뜸을 뜨면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 많은 데다 고질병이 겹쳐서 전혀 음식을 먹지 못하므로 혈기(血氣)가 고갈되었고, 숙환인 간질까지 겹쳐 발병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방면으로 치료를 해보았으나 전혀 효험이 없었습니다.
- 『중종실록』 중종 21년(1526) 8월 26일 -
한편 『세조실록』 세조 3년(1457) 9월 16일에는 "잔질(殘疾)과 독질(篤疾)로서 더욱 의탁할 곳이 없는 자 맹인(盲人)을 위해서는 이미 명통사(明通寺: 맹인들을 구호하던 절)를 설립하였고, 농아(聾啞)와 건벽(蹇躄: 절름발이) 등의 사람들은 한성부로 하여 널리 보수(保授)를 찾고, 동·서 활인원에서 후히 구휼하라"라는 명을 보아 다양한 장애인에게 사회적 배려를 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잔질(殘疾)은 몸에 장애가 있는 자를 말하며 독질(篤疾)은 불치병을 말하는데 독질(篤疾)의 경우 『경국대전』 「병전(兵典)-군역의 면제(免役)」편을 보면 '독질이란 난치의 질환으로 간질, 청맹과니, 팔다리 넷 중에서 둘 이상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되어있다. 따라서 조선 시대 간질에 걸린 사람을 국가가 돌봐주어야 할 사람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는데 세종은 간질에 걸린 자 중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자는 국역을 면하게 하였고, 특히 노비라 할지라도 그 역을 없애도록 하기도 하였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응기(金應箕)를 보내어 사위(辭位: 왕위를 물러남)를 청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임유겸(任由謙)을 보내어 승습(承襲: 왕위를 계승함)을 청하였다.
그 주문(奏文)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 신(臣) 이융(李㦕: 연산군)은 왕위 사퇴를 청하는 일로 삼가 아룁니다.
신은 본래 풍현증(風眩症: 간질)이 있어 무시로 발작하였는데, 세자 이황(李𩔇)이 정덕(正德)
원년(1506) 5월 질병에 걸려 갑자기 요절하는 바람에 신이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조리를 잘못하여 묵은 질환이 다시 발작해서 고질로 변하였기 때문에 군국 서무를 능히 재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러러 바라건대, 천자의 권명(眷命)과 선조의 가업을 받들어 지키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의 친아우 진성군 이역(李懌: 중종)은 나이 장성하고 어질어 일찍부터 착한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무거운 짐을 부탁하는 것이 진실로 여망에 맞으므로, 이미 정덕 원년 9월 초2일에 신의 어머니 강정 왕비(康靖王妃: 성종 비)에게 품고 하여
이역으로 하여금 임시로 건국의 모든 일을 맡아 승습(聾襲: 왕위를 잇다)하게 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감(聖鑑)으로 밝게 살피시어 특별히 밝은 윤허를 내리소서. 이를 위하여 삼가 갖추어 주문합니다.
- 『중종실록』 중종 1년(1506) 9월 27일 -
*중종반정 후 연산군의 폐위와 중종의 등극을 알리는 사신을 보내면서, 조선 조정에서는 연산군이 간질에 걸려 일을 수행하지 못하고 세자가 죽었다며 그의 아우인 중종에게 선위하였다고 거짓으로 명분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