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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36) 왕들의 온천욕과 안질
온수현(温水県) 온천에 행차할 때 왕세자 이하 종친, 부마, 의정부, 육조, 대간 등이 모셨다. 또 도진무(都鎮撫), 각위(各衛), 절제사, 사복제조 등이 호종했다. 도성에 머무르는 백관들은 흥인문 밖에서 전송하였다. 중궁이 떠날 때는 내명부에서 척리까지 모두 시위하여 흥인문 밖에서 전송하였다. 중궁은 연(輦)을 타고, 숙의는 교자를 타고, 소용 및 숙용과 궁녀는 말을 탔다.
-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3월 25일 -
조선의 임금들은 질환을 치료할 목적으로 온천욕을 즐겼다. 공통으로 다스리고자 한 질병은 풍질이었다. 태조와 정종, 태종, 세종이 모두 풍질을 앓았다. 세종 1년 2월, 『세종실록』에는 풍병으로 고통받은 태종이 탕약이 듣지 않자 온천을 찾는 과정이 연이어 기록되어 있다. 세종의 아내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역시 풍병을 앓아 1422년 3월 2일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1백여 명을 대동하고 온양의 온천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풍병을 앓던 왕후가 효험을 보이자 의원과 의녀에게 포상하기도 했다.
세종 15년의 위 기록은 세종과 소헌왕후, 후궁들 그리고 세자를 포함한 왕실 가족들이 온천을 찾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왕들은 풍질과 함께 종기, 어깨 결림, 안질, 풍습병, 흉복통, 피부병 등의 이유로 온천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소갈병, 안질, 풍질, 옹저 등 여러 질환에 시달린 세종은 도성 인근의 온천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온양이나 청주, 평주 등으로의 행차는 백성들을 고단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종실록』 세종 25년(1443) 2월 28일에는 "내가 두 번 온천(温泉)에 갔었는데 민폐(民弊)가 많으므로 이제는 그만두려 하였더니, 승지들이 정부 대신들과 더불어 가기를 청하고, 나 또한 다리 아픈 병이 있기에 마지못하여 가려 한다. 너희들은 나의 깊은 뜻을 알아서 폐단이 없도록 조치하라"고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렇게 부평, 구리, 개성 등에서 온천을 찾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만다. 결국, 임금은 1415년, 1423년에 온양을 찾는다. 온양에서 신병치료를 한 왕은 온수(온양)를 현에서 군으로 승격시킨다. 1424년, 이천의 온천을 찾았던 임금은 이듬해에는 다시 온양을 방문한다. 세종은 1426년에는 청주 초수리(椒水里)에서 한동안 머물기도 한다.
『세종실록』 9년(1427) 9월 27일을 보면 세종은 서울과 지방의 온정(温井)에서 병든 사람을 구료(救療)하는 사의(事宜)를 제정하기도 했는데 큰 흐름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온천 근처에 사는 선량한 사람과 승려를 구호인으로 지정하고 둘째, 환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미두(米豆)를 차등 지급하며 마지막으로 환자의 거처와 물품은 관에서 공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온천의 효과는 미네랄 등 성분에 따라 차이가 난다. 일반적으로 피부, 순환기, 근골격, 대사성 질환이나 각질 제거, 피부미용, 활성산소 억제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심신안정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모든 질환에 온천욕이 좋은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 온천욕에 대한 시각은 어의(御医)들도 엇갈렸다.
안질과 부스럼으로 고생한 현종 임금은 치료를 위해 온천에 가고자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여러 의관은 "임금의 눈병과 부스럼은 모두 습열 탓에 생긴 것으로 이럴 땐 온정(温井)이 효과적이다"는 의견을 낸다. 부스럼의 원인을 화기(火気)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어의 유후성(柳後聖)만은 "임금의 병환은 비위(脾胃)에 습열이 있어서일 뿐만 아니라 심간(心肝)에 화기가 자못 성해서이니 열을 오르게 해 더 나쁘게 할까 봐 걱정이다"라며 온천수로 이를 다스리는 것에 반대한다(『현종개수실록』 현종 6년(1665) 3월 14일). 하지만 염증과 안질이 심각한 상황으로 진행되어 다른 약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약방 부제조 윤강은 습열 제거를 위해 온천 치료를 다시금 청한다.
“임금님의 가슴과 등의 습창(湿瘡)이 갈수록 심해지고 홍점이 번져 가려움이 있습니다. 머리의 부스럼은 조(粟)를 싼 형태와 같고 예전의 핵환(核患)은 여전히 뿌리가 남아 있습니다. 더 심해질 위험도 있습니다. 올해부터 진행된 습창이 만약 더 심해지면 치료가 쉽지 않습니다. 두상의 부스럼이 악화하면 습열 상승이 계속되어 하강이 어렵습니다. 안질 재발 우려도 있습니다. 더욱이 날씨도 더워지고 있습니다. 여러 의관과 상의하니 안질은 모두 습열의 승강이 원인입니다. 습창이 성해져 흉부, 배부, 두부, 발제까지 이르면 안질이 심해집니다. 또 핵환(核患) 재발도 걱정됩니다. 반드시 습열을 제거해야 안질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수침은 일시적 효과로 재발되기도 하고, 환약은 장기 복용해야 합니다. 탕제는 위기(胃気)가 먼저 상해 복용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습열치료 방법은 백방으로 생각해도 온천욕입니다.”
- 『승정원일기』 현종 6년(1665) 4월 6일 -
현종의 온천 치료는 효과가 있었다. 현종은 1667년 3월 26일 어머니를 모시고 온천에 간다. 이때 송준길에게 "눈병이 심했는데 목욕 후에 곧 효과가 나타났다. 환궁 후 처음에는 눈뜨는 게 아팠으나 6, 7일이 지난 후에 좋아지고 지금은 예전처럼 상쾌하다. 예전에는 백약이 무효했다. 매해 1, 2월만 되면 안질이 도졌는데 올해는 괜찮다"라며 온천욕이 효과적이었음을 설명한다.
온천욕은 온천 속에 함유된 탄산, 유황 등의 성분으로 질병 치료에 도움이 되기는 하나, 온욕자체가 가지고 있는 효과가 가장 크다. 평소에도 체온이 떨어지면 면역력도 같이 떨어지므로 따뜻한 물이나 차를 자주 마시고 온욕을 하면 좋다. 그러나 열이 많은 체질이나 습열이 있는 사람은 지나치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