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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칼럼

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 의학(32) 왕의 치아 관리와 치통으로 사직하는 신하

전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이 이행(李行)이 상언(上言)하기를,
"신(臣)의 나이는 이제 79세가 되었나이다. 이(齒)가 다 빠지고, 다리는 기운이 없어서 일어나고 정지하는 것이 거북하며, 먹고 마시는 일이 더욱 어렵나이다. 더구나 기침이 가끔 나서 성명(聖明)한 세상에 장차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사오니, 원컨대 부모의 분묘(墳墓)가 있는 강음(江陰)에 돌아가서 여생(餘生)을 마치게 하여 주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11년(1429) 8월 15일 -

「세종실록」 세종 11년(1429) 8월 15일 기록에는 대제학을 지낸 이행(李行)의 사직 상소가 실려 있다. 79세의 이행(李行)은 위와 같이 건강이 안 좋아져서 업무수행에 어려움이 있음을 아뢴다. 임금은 이행이 고령으로 치아 상태 등이 심히 나빠진 것을 보고 사직을 허락했다. 세종 22년(1440) 3월 24일 70세가 된 좌찬성 이맹균(李孟畇) 역시 "이(齒)와 머리(髮)가 이미 쇠(衰)하고, 병도 심하고, 정신이 혼모(昏耗)하고, 걷기가 어렵다"며 노쇠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한다. 하지만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끝내 퇴직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고 만다.

한편, 1422년 형조에서 화지량(오늘날의 화성 화량진)의 종4품 무관인 만호(萬戶)인 박장수의 비행 보고가 올라온다. 세종은 상(喪)을 당한 처지인데도 음주 가무에, 고기를 먹는 것도 모자라 사람의 치아를 부러뜨린 박장수의 직첩(職牒:관리의 임명장)을 빼앗고, 곤장 1백 대의 벌을 내린다.

이렇듯 옛사람을 심히 아프게 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치과 질환이었다. 노화로 인해 치아가 거의 상실된 경우나 사고로 치아가 손상된 경우 모두 심한 통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치통의 공포는 임금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내가 치통(齒痛)을 앓은 지 해가 넘었는데, 널리 의약(醫藥)을 시험하였으나 효력이 없다. 또 대왕대비께서 일찍이 식상증(食傷證)이 있었는데 지금 또 가슴앓이를 얻었으니, 관반(館伴)으로 하여 사신에게 물으면 저들이 반드시 마음을 다하여 약을 구할 것이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김계창(金季昌)이 말하기를,
"전하의 치통은 다른 나라 사람에게 알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옛적에 진후(晉侯)가 병이 있어 진(秦)나라에 의원을 구하였으니, 적국(敵國)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중국(中國)이겠는가? 관반에게 한가하게 이야기하는 사이에 조용히 물어보게 하라."
하였다.

-「성종실록」성종 11년(1480) 7월 8일 -

조선에서 치아가 가장 약한 왕이 성종이었다. 몇 년이나 극심한 통증을 앓았던 성종은 중국 사신에게 말하여 약을 구하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묻는다. 그러나 임금의 질환은 나라의 기밀 사항이었기에 다른 나라 사람에게 알려서는 안 되며 이를 반대하고 나서자 성종은 조용하게라도 물어보라 전교한다.

그리고 얼마 후인 7월 21일 중국 사신 환송연에서 사신이 술을 올리자 성종은 치통(齒痛)을 이유로 거절한다. 그러면서 성종이 말하길 "대인이 준 곡소산(哭笑散)을 먹고서 치통이 조금 덜한데, 술을 마시면 다시 아플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성종은 중국 사신에게 약을 구한 듯하다. 이때 중국 사신이 성종에게 건네준 곡소산은 사향, 유황, 웅황, 후추 등을 혼합한 약이다. 이에 사신은 "제게 통증을 멈추는 약이 있으니, 청컨대 다 마시소서"라고 청하니 임금이 드디어 다 마셨다고 한다.

그러나 「성종실록」 성종 14년(1483) 5월 13일 "주상께서 항상 치통(齒痛)으로 음식을 감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성종의 치통은 쉽게 낫질 않은 듯하다. 이에 성종은 여의(女醫) 귀금(貴今)에게 치통의 치료법을 말하라 명한다. 귀금은 제주의 의녀(醫女) 장덕(張德)의 제자였는데, 장덕은 치충(齒蟲)을 치료하는 비법을 알고 있었는데 죽을 무렵에 그 기술을 노비 귀금에게 전수했다고 한다. 성종은 귀금이 그 비법을 알고도 숨기려 하니 이는 이익을 독차지하려는 것이라며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면 국문을 하겠다고까지 한다. 이에 귀금은 자신은 일곱 살 때부터 그 기술을 배워 열여섯이 되어야 완성하였다며 자신이 마음을 다해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익히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성종실록」성종 23년(1492) 6월 14일)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을 보면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과 중종뿐만 아니라 광해군,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사도세자 등이 치통을 앓았다. 특히 「중종실록」을 보면 중종이 치통으로 고생한 기록과 함께 그 처방에 대한 것도 찾아볼 수 있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나에게 본디 이앓이 증세가 있는데 아픈 것은 빠졌으나, 지금 있는 이가 또 아프고 흔들린다. 이 이가 빠지면 음식을 먹기 어렵겠고 잇몸도 붓고 진물이 나오는데, 약으로 고칠 수 있는가? 이 뜻은 이미 약방(藥房)에 분부하였으나, 좌승지 안현(安玹)이 약리(藥理)를 안다 하니, 제조(提調)와 같이 의논하여 아뢰라. 좌승지가 오지 않았거든 승지가 들어서 전해 말하라."
...(중략)...
강현 등이 다시 아뢰기를,
"먼저 옥지산(玉池散)으로 양치질한 다음에 청위산(淸胃散)을 복용하고 뇌아산(牢牙散)을 아픈 이의 겉에 바르고 또 피마자(蓖麻子) 줄기를 아픈 이에 눌러 무는데 뽕나무 가지를 써도 됩니다. 다만 뇌아산에는 양의 정강이뼈를 넣으므로 쉽게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뇌아산에 양의 정강이뼈를 넣는다면 이것 때문에 양을 잡을 수 없겠으나, 대제(大祭)도 멀지 않았으니, 적당히 얻어서 짓도록 하라."

-「중종실록」중종 39년(1544) 6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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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에서 중종에게 처방된 옥지산은 「동의보감」에서 "치병(齒病)이 골조풍(骨槽風)으로 변하여 피가 나고 뼈가 드러날 때 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지골피, 백지, 세신, 방풍, 승마, 천궁, 당귀, 괴화, 고본, 감초가 포함되어 있다. 또 청위산은 "위열(胃熱)로 위아래의 치아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뇌까지 당기고, 얼굴 가득히 열이 나며, 찬 것은 좋아하고 뜨거운 것은 싫어하는 것을 치료한다"라고 하였는데 황련, 승마, 당귀, 목단피, 생지황 등이 포함되어 있다. 뇌아산의 경우 「향약집성방」에 "치아가 빠지려고 흔들릴 때 사용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치통의 원인을 일곱 가지로 분류한다. 풍열(風熱), 풍랭(風冷), 열(熱), 한(寒), 독담(毒痰), 어혈(瘀血), 충식(蟲蝕)이 그것이다. 풍열통은 몸이 뜨겁고, 잇몸이 붓고, 고름이 생기고 악취가 나는 증상이다. 풍랭통은 허증(虛症)으로 충치가 없고, 잇몸이 붓지 않으나 치아가 흔들리는 증상을 말하며, 열통은 위에 열(熱)이 쌓여 잇몸이 붓고 구취가 난다. 한통은 차가운 것에 대한 예민한 반응으로 전신질환과 연관되어 있다. 독담통은 가래와 기침이 심하며 이비인후과 질환과 연계돼 있다. 어혈통은 잇몸의 풍열로 피가 나고 담이 생겨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있으며 충식통은 벌레가 이를 갉아먹거나 간혹 음식 찌꺼기가 끼어 발생하는 질환이다. 치은염, 치주염, 풍치, 구강염, 구취로 볼 수 있다. 현대에는 충치 치료와 보철, 인플란트 등과 같은 치과 치료기술이 발달하여 많은 질환이 정복되었지만, 치주 질환은 여전히 한의학적 치료가 유효하다.

「동의보감」은 이와 같은 치통의 근본 원인을 위(胃)의 습열(濕熱)과 풍사(風邪)로 보고 있다. 그래서 구강 질환 치료 방법 중 하나로 위장의 열을 다스리는 것에서 찾는다. 치아가 입 주위, 잇몸을 지나가는 경락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위와 장에 열이 쌓이면 구내염, 치주 질환 그리고 입 냄새를 유발하며 풍치가 생기기 때문에 위의 열을 없애면 치통의 일부와 구취를 해소할 수 있다.

처방 중 하나가 사위탕(瀉胃湯)이다. 「동의보감」에서는 위열로 인한 잇몸 부기, 잇몸 염증, 잇몸 허는 증상, 치통, 구취 용도로 설명하는데 이 사위탕에 대해 "위열(胃熱)로 인한 치통을 귀신같이 치료한다"라고 했다. 이 사위탕에는 박하, 당귀, 천궁, 생지황, 황련, 적작약, 치자, 방풍, 목단피, 형개, 감초가 들어가 있다. 그러나 속이 냉한 사람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중종에게 처방되었다는 청위산도 좋으며 위의 열을 내리는 처방에는 가감감로음(加減甘露飮), 자음청위환(滋陰淸胃丸)도 일반적이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으며 (人以食而生)
먹을 때에는 반드시 이로 씹는데 (食必以其齒)
이가 몹시 아파 먹지를 못하니 (齒痛莫加飧)
하늘이 나를 죽이려는가 보다. (天殆使我死)
강하면 꺾이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剛折亦云經)
늙고 이 빠지니 더욱 부끄럽네. (老豁更堪恥)
아직도 몇 개가 남아 있지만 (餘有幾箇存)
뿌리가 흔들려서 붙을 데 없더니 (浮動根無寄)
이제 다시 쑤시고 아파서 (今者又復痛)
두통까지 일어나네. (延及頭亦爾)
찬물도 마실 수 없고 (水寒不可飮)
뜨거운 물도 입에 댈 수 없네. (湯亦不可試)
죽도 식기를 기다려 (糜粥候冷熱)
겨우 핥아 먹노라. (然後僅能舐)
하물며 고기를 씹을 수 있으랴. (矧可齕肉爲)
고기가 있어도 한갓 도마에 있을 뿐이네. (有肉空在杫)
이 모두가 늙음 때문이니 (是實老所然)
죽어야 비로소 끝나리. (無身始迺已)

- 이규보(李奎報:1168~1241)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다시 이가 아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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