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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37) 조선의 군사의학과 금창(金瘡) 치료법
공조참의 장우량(張友良)이 상언하기를,
"한번 작정하여 경중과 외방에 의약(医薬)을 설치함은 오로지 인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옵니다.
경상우도 수군은 수영(水営)에 1천여 명, 각 포구(浦口)에 5, 6백 명이 있습니다.
해변에는 종독(瘇毒)이 매우 심해 감기나 열병 또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1백 수십 명입니다. 또 열에 여덟이나 아홉은 두통과 복통에 시달립니다.
부근(附近) 각 고을의 의학 생도로 하여금 구호하고 치료하게 함은 정령(政令)에 뚜렷이 있사오나,
그러나, 문자를 알지 못하는 무리들이 진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오니, 어찌 병의 증상(病状)이 가볍고 중함과 약성의 적의(適宜) 여부를 알겠나이까."
- 『세종실록』 세종 16년(1434) 5월 27일 -
1434년 5월 공조참의 장우량은 경상우도 수군의 건강 상황을 알리는 보고를 세종에게 올린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상당수 병사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으나 병영에는 의원이 없었다. 이에 아픈 병사를 인근 고을의 의학 생도에게 치료받게 하였으나 그들의 의료수준은 높지 않았다. 심지어 글을 알지 못하는 생도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병을 제대로 진단하지도 못했고 처방 또한 바르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에 따라 약의 효험이 떨어져 인명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에 장우량은 "비록 나라 법에 따라 교유(教諭: 의학 교수)로 파견되었으나 대개 한 도의 육지 60여 군(郡)을 순행하면서 고찰하다 보면 어느 겨를에 여러 섬까지 두루 다니면서 선군(船軍)을 구료할 수 있겠나이까"라고 말하며 법의 사각지대가 있음을 호소한다. 그리고 이어 그는 전의감 의원 1인을 파견할 것을 청한다.
이에 세종은 전의감, 혜민국, 제생원에서 능력 있는 의원을 선발해 각도에 한 명씩 파견하게 하고, 임기는 1년으로 순환 근무시켰다. 또 종9품 의원인 심약(審薬)을 각 도의 감영(監営)과 병영(兵営)에 파견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의 업무는 약재 진상과 함께 백성, 군사의 치료였다. 즉 이들은 일종의 군의관인 셈이었다.
군대에 의원이 있었다는 기록은 『삼국유사』 「후백제」편을 통해 알 수 있다. 934년 운주 전투가 고려의 승리로 끝나자 견훤의 부하였던 군사(軍師) 종훈(宗訓)과 장군 상봉(尚逢), 최필(崔弼)과 함께 의원(医者) 지겸(之謙)이 항복했다고 한다. 군의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고려사』 「병제」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종 24년(1146) 각 군의 군후(軍侯)가 약원(薬員) 5인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아마도 약원은 의무 활동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병조의 군직(軍職)에는 의원이 있었다. 세종 12년(1430) 3월 14일, 임금은 "이제부터 무예를 연습할 때 삼군(三軍)에서 각기 의원(医員) 1인을 정하여 군대를 따르게 하여 군졸이 병이 있으면 치료하게 하라"는 명을 병조에 내린다.
세종 시기엔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다. 남으로는 대마도 정벌이 있었고, 북으로는 여진을 밀어내 4군 6진을 개척하였다. 전투는 이질이나 장티푸스 같은 전염성 질병, 다양한 피부병, 자상과 찰과상, 성병 등을 발생시킨다. 그중에서도 칼이나 창에 베이고 찔린 후의 감염 치료가 급선무였다. 옛 전쟁에서는 칼이나 창 또는 총탄에 의해 현장에서 죽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 때 입은 부상이 심해지고, 전염병이 돌아 사망하는 비율이 더 높았다. 따라서 전통 시대에는 병장기로 다친 상처를 치료하는 외과 의학이 발달했다.
세종 15년(1433)에 편찬된 『향약집성방』의 금창(金瘡)은 군 의학의 산물이다. 금창은 칼, 창, 화살 등 금속에 다친 상처를 말한다. 깊은 자상(刺傷)이나 찰과상의 지혈(止血)은 약초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지혈 처방에 유용한 광물성 약재도 처방되었는데 칼에 베인 곳에 쓰는 금상산(金傷散)은 석회가 주성분이었다. 석회의 칼슘은 피를 멎게 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 밖에도 자석, 곱돌, 쇳가루, 말발굽 등을 가루 내거나 태워서 바르는 방법을 제시한다.
『선조실록』에는 금창에 쓰인 약재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발발 후 2년이 흐른 선조 27년(1592) 1월 2일 선조는 혈갈(血蝎)이 금창(金瘡)을 치료하는 약이니 군사들에게 나누어주라 명한다. 혈갈은 종려나무과의 상록식물인 기린갈(麒麟竭)의 열매나 나무줄기의 진을 말린 것으로 『동의보감』에서도 쇠붙이에 다친 상처를 치료하고 지혈하며, 진통을 가라앉히고 살이 돋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즉위년(1659) 5월 4일 신가귀(申可貴)가 침을 잘못 놓아 효종이 피를 흘리자 몇 가지 약을 급히 썼는데 혈갈은 그때 사용한 약재 중 하나였다.
또한 『승정원일기』 인조 14년(1636) 12월 21일, 허계(許啓)가 화살을 맞은 군사의 상처 입은 부위를 살피고 서계를 올리자 인조는 "청소(清蘇)와 혈갈(血蝎)을 찾아서 지급해 주고 이후에는 비록 전교가 없더라도 상당한 약재를 자주 찾아서 지급하고 진심으로 구호하라"고 명을 내린다. 이때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청소(清蘇)는 푸른 잎의 소엽(蘇葉)을 말하며 『수세비결(寿世秘訣)』에는 "금창으로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나면, 어린 소엽(蘇葉)과 상엽(桑葉:뽕나무 잎)을 함께 빻아 붙인다"라고 하였다.
한편, 『향약집성방』은 코피를 멎게 하거나 어혈을 제거하고 종기를 치료하는 약재 중 하나로 난발(乱髪)을 게재하고 있다. 난발은 곧 사람의 머리카락을 태운 재를 말한다.
머리카락을 재로 만든 것은 전포증(転胞症)으로 소변이 안 나오거나, 적리(赤痢)와 백리(白痢)가 한꺼번에 겹친 이질(痢疾), 목 메임, 코피, 옹종(癰腫), 호뇨자(狐尿剌), 시주(尸疰), 정종(丁腫), 골저(骨疽)와 잡창(雑瘡)을 치료한다.
- 『향약집성방』 「난발(乱髪)」 -
이 난발은 성병 치료에도 쓰였는데 같은 책 「옹저창양문(癰疽瘡瘍門)」에는 음경에 돋은 3~5개의 작은 누창에 피와 고름이 나오면 기름 먹인 난발을 약성이 남게 태워 붙이거나 미음에 타 식전에 먹는다고 하였다.
칼 등의 쇠붙이에 다친 후 바로 치료하지 않으면 균이 침입하고, 곪게 돼 환부가 더 커진다. 출혈도 심할 수 있다. 부상 과정에서 내장(内臓)이 손상되면 어혈(瘀血)이 생길 수 있는데 치료는 먼저 어혈 제거하고, 출혈이 많으면 기혈(気血)을 보한다. 『단곡경험방(丹谷経験方)』에서도 쇠붙이에 상하거나 뼈가 부러졌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속까지 상한 경우 먼저 어혈을 몰아내야 하는데 만약 피를 너무 많이 흘렸으면 기혈(気血)을 고르게 하고 길러 주어야 한다고 하며 이에 대한 처방으로 화예석산(花蘂石散), 계명산(鶏鳴散), 복원활혈탕(復元活血湯)을 제시하고 있다.
화예석산은 화예석과 유황으로 만든 약으로, 이를 복용하면 어혈이 토하거나 설사를 통해 나온다고 하였으며 계명산은 대황(술에 축여 찐다)과 당귀, 도인(桃仁)을 썰어 술에 달여서 첫닭이 울 때 복용하면 효과가 좋다고 하였다. 또 복원활혈탕은 대황, 당귀, 시호(柴胡), 천산갑, 과루근(瓜蔞根), 감초, 도인, 홍화를 물과 술을 반씩 넣고 달여 먹으면 외상을 당하였거나 떨어져서 어혈이 옆구리 아래로 몰려 몹시 아파서 몸을 돌리지 못하는 것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특진관 이계맹(李継孟)이 아뢰기를) 당번(当番)한 군사들을
모두 군영(軍営)에 있도록 함은 의외의 일에 대비하려는 것인데 지난번에 비록 엄격히 군영에 있도록 하였지만
모두 군영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었고 지금은 병조가 매우 엄하게 단속하기 때문에 군사들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데,
다만 군영은 좁고 인원은 많아 열기(熱気)가 훈증하므로 병들어 죽는 자가 자못 많으니,
신의 생각에는 의원을 정해 보내 구료(救療)함이 합당하겠습니다(중략)."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사들이 모두 군영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그런 폐단이 있기 때문이니,
만일 능히 무마하여 돌보아준다면 누가 들어가지 않으려 하겠는가? 의약품 및 마초를 해사로 하여금 마련하여 입계(入啓)하도록 해야 한다."하였다.
- 『중종실록』 중종 17년(1522) 4월 1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