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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칼럼

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35) 설사와 풍기(風氣)

“내가 설사(泄瀉)를 앓는 중인데 이틀 뒤에 풍기(風氣)가 일어났다. 풍기는 이미 나았으나 설사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만약 긴 시간 찬() 바람을 맞으면 병이 다시 발생할 것이 두렵다. (사신에게) 동짓날 태평관에서 행례(行禮)한 뒤 몸이 편치 않다는 뜻을 말한 뒤 세자에게 대신 연회를 열게 하고자 한다.”

-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1월 1일 -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는 왕을 비롯하여 왕세자, 종친, 대신이 주관했다. 세종은 되도록 연회를 직접 베풀었다. 조선의 국익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국방을 안정시키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려면 명나라와의 우호 관계가 꼭 필요했다. 그리고 바로 그 소통의 1차 관문이 사신이었다. 이에 세종은 중국어를 직접 익혔다.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12월 23일에는 "내가 한어의 역서(譯書)를 배우는 것은 명나라의 사신과 서로 접할 때, 미리 그 말을 알면 그 대답할 말을 혹 빨리 생각하여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기에 세종은 사신과의 대화에서 즉흥적인 대답이 아닌 조금 더 정연한 논리를 펼칠 수 있었다. 이처럼, 세종이 적극적으로 연회에 참석한 이유는 외교를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433년 세종은 설사로 인해 연회 참석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결국 행사 참여를 물리고 만다. 왕은 1년 전에도 설사로 인해 세자에게 그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명나라로 돌아가는 사신 윤봉에게 "설사가 조금 잦아들었소. 그러나 재발이 염려돼 모화관에 나아가지 못하오. 전별연은 세자가 할 것이오"라고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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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행사 참여를 어렵게 한 설사는 풍기(風氣)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설사가 계속되면 면역력이 저하되며 여러 질환이 이어서 발생할 수 있다. 풍기는 기()가 허()하여 풍사(風邪)가 침입한 병증이다.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에서는 '풍기장어피부지간(風氣藏於皮膚之間)'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해석 그대로는 '피부 사이에 풍기가 있다'는 뜻이다. 이를 상풍(傷風)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의 몸살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땀이 나면서 바람이 몸에 닿는 것이 싫고, 콧물이 나고 코가 막히며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기는 경락을 따라 순환해 장부(臟腑)를 튼튼하게 하는데, 기가 약하면 풍사의 침입을 막지 못한다. 상풍은 삼소음, 충화산, 방풍충화탕으로 치료한다.

설사는 묽은 변을 하루에 여러 차례 보는 것이다. 2주 이상 계속되면 만성이고, 하루 이틀이나 며칠 갑자기 진행되는 것은 급성으로 구분된다. 만성 설사인 구설(久泄)은 원기와 진음(眞陰) 부족 경향이 강하다. 만성 설사는 몸의 허약과 피로를 가중시키고 자칫 상풍과 같은 2차 증상으로 악화할 수도 있다.

설사는 세종이 염려한 대로 찬바람으로 악화할 수도 있다. 찬 기운, 습한 기운 등에 노출이 되면 몸에 열이 나고 맥이 빨라지고 숨이 차기도 하고, 반대로 몸이 춥고 쑤시며 구역질을 하면서 기침을 하기도 한다. 이때 치료법은 서로 다르다. 전자는 시령탕으로 번갈과 설사를 치료하고 후자는 열성이 강한 약재인 부자(附子)가 들어가는 진무탕으로 치료한다.

동의보감에는 설사의 색으로도 원인을 구분했다. 설사가 백색이면 한증이고, 청색, 황색, 홍색, 적색, 흑색이면 모두 열증이다. 홍색, 적색, 흑색으로 갈수록 열이 더 심하다는 의미이고 이런 경우에는 황금탕을 쓴다.

임금의 복통(腹痛)과 설사(泄瀉)가 더욱 심하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고 황금탕(黃芩湯)을 지어 올렸다.

- 경종실록 경종 4년(1724) 8월 22일 -

이질로 피고름이 생기고 몸에 열이 있으며, 배가 아프고 맥이 홍삭(洪數)한 것을 치료한다. 황금, 백작약 각 2돈, 감초 1돈. 이 약들을 썰어 1첩으로 하여 물에 달여 먹는다. 배가 심하게 아플 때는 계심 3푼을 더한다. 이를 황금탕이라 한다.

- 허준(許浚:1539~1615), 동의보감(東醫寶鑑) 대변(大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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