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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칼럼

세종실록으로 읽는 왕실의학(38) 세종의 의학발전 프로젝트, 유학자 의원 양성

옛날 좋은 처방은 유의(儒醫)의 손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자연의 이치에 능통한 문인(文人)이 의술을 겸한 예는 과거에도 있습니다. 전의겸정(典醫兼正) 겸부정(兼副正) 겸판관(兼判官) 겸주부(兼主簿) 각 1명씩을 증원, 박학문사(博學文士)로서 제수하시옵소서. 혜민국과 제생원에는 제거(提擧) 별좌(別坐) 중 한 사람과 겸승(兼丞) 1인을 학식이 넓고 굳세며, 바르고 부지런하며 삼가는 문사에게 맡기시옵소서.

- 세종실록 세종 16년(1434) 7월 25일 -

1434년 이조(吏曹)에서 의술은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생극소식(生克消息)의 이치를 터득한 사람에게 강점이 있음을 아뢰며 세종에게 유의(儒醫)의 필요성을 건의한다.

한의학은 동양 철학의 음양오행과 연관이 깊다. 즉 음양오행의 학문과 경험적 의술이 주요한 배경이 되는데, 이에 따라 한의학에서는 인체 형성과 병의 주요 치료 원리를 음과 양의 조화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부족하면 보()하고, 지나치면 사()해 음양의 균형을 유지하게 한다.

한의학에서는 오행의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을 인체 장기(臟器)에 대응하여 파악한다. 예컨대, 역경 풍()에서 "천지의 차고 빔도 때에 따라 자라나고 소멸된다(天地盈虛,與時消息)"라는 대목을 통해 처음 언급된 소식은 자람과 소멸함을 의미한다. 양()나라 황간(皇侃)은 식()을 양기의 생성, 소()를 음기의 소멸(乾者阳生为息, 坤者阴死为消)로 풀이하기도 하였다. 한의학에서는 소식(消息)을 천지의 기운 순환에 대응하는 몸의 기혈 순환의 측면에서 이해한다. 소식은 작게는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숨을 쉬는 행위조차 음양오행과 그 순환의 이치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이를 소우주인 인체에 적용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의 방법을 찾은 것이다.

자연친화적인 동양 철학적 관점에서 인체를 생각한 한의학은 그래서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일수록 유능한 의원이 될 개연성이 높았다. 유학과 의학에 관심 많았던 세종 역시 그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임금은 이조의 건의를 받은 직후, 유학자가 의술을 다루는 유의(儒醫) 제도를 시행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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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儒醫)란 유학자로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술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논어(論語)의 위정(爲政)편에는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이 나온다. 공자가 생각한 군자는 바람직한 인간관계나 사회의 목표를 제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유학자는 두루 알아야 하고, 널리 사회를 이롭게 하려면 한 가지 일에만 종사해서는 안 된다.

세종실록 세종 7년(1425) 5월 3일 예조에서는 전의감(典醫監)의 현실에 대해 의원의 수효가 적고 또 의술 또한 제약(劑藥)과 병 다스리는 데는 모두 숙달하지 못하다고 보고한다. 또 세종 22년(1440) 6월 25일에는 의술(醫術)의 심오(深奧)하고 정미한 것을 아는 자가 적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처럼 조선 초 의료인의 수는 부족했고, 의술 또한 발달하지 못했다. 따라서 세종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유학 지식이 풍부하고, 의학적 식견이 높은 사람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인다. 개인 차원에서 공부하는 인재가 나라의 의료정책을 담당하고, 의술을 직접 구현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유의(儒醫)를 양성하기 위한 제도가 바로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이다.

조선시대 의관(醫官)이 되는 일반적인 방법은 의과(醫科)에 합격하는 것과 취재(取才)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전의감에서 초시 합격자로 18명은 전의감에서 선발하였고, 예조와 전의감에 주관한 복시에서 이 중 9명을 합격시켰다. 과목은 초시와 복시가 같았으며 찬도맥(簒圖脉), 직지방(直指方), 창진집(瘡疹集) 등을 비롯한 12개 과목이었다. 또, 의과(醫科)와 함께 의관을 선발하는 방법이었던 의학(醫學) 취재(取才)와 침구의(針灸醫) 취재 규정도 경국대전에 실려 있는데, 이에 의하면 1월, 4월, 7월, 10월에 예조와 전의감 제조가 시행되었다. 교과목은 의과와 비슷하나 더 많았다.

이외에 의관이 되는 두 가지 방법이 더 있었는데 이미 실력이 검증된 유능한 의원을 특채하는 경우와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 재직하는 것이었다.

세종이 처음 시행한 의서습독관의 경우 정원은 9명으로 유지되다가 단종 2년(1454)에 15명으로 세조 8년(1462)에는 30명으로 그 수가 늘었으며, 경국대전에도 명문화되어 이 수가 계속 유지된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의서(醫書)를 습독(習讀)하는 관원을 권장하고 징계하는 조건은 이러합니다.
1. 습독(習讀)하는 사람의 수가 적으니, 청컨대 30인으로 정원을 삼고, 삼관(三館)과 생원(生員)·진사(進士) 가운데 나이 25세 이하로서 총명하고 민첩한 자를 의정부(議政府)·이조(吏曹)·예조(禮曹)·전의 제조(典醫提調) 등이 함께 골라서 정하게 하소서.
2. 10일마다 한 차례씩 약방 승지(藥房承旨)·내의원(內醫院)의 당상(堂上)이 궐내(闕內)에 모아서, 직지(直指)·찬도(纂圖)의 두 책을 배강(背講)하여 약() 이상인 자와, 창진집(瘡疹集)·산서(産書)·장자화방(張子華方) 중 두 책을 임문(臨文)해서 강()하여 모두 약()인 자와, 그 나머지 여러 방서(方書) 중 찌()를 뽑아 한 책을 강()하여 약()인 자는 도목(都目)을 계산하지 아니하고 가자(加資)하여 동반(東班)·서반(西班)에 서용(敍用)하게 하소서.
3. 내의원(內醫院)의 관원(官員) 중에서 직 이하의 관원은 3개월마다 습독(習讀)하고, 과거 출신(出身)으로 동반(東班)·서반(西班)의 관직을 받은 사람은 매달 말에 예조의 당상(堂上)과 전의 제조(典醫提調) 각각 1원()이 함께 고강(考講)하게 하소서.
4. 불통(不通)이 가장 많아서 나태하고 태만한 것이 현저한 자는 고신(告身)을 거두고 갓을 씌워서 그대로 출사(出仕)시키되, 그 습독(習讀)하기에 부지런하고 삼가서 여러 방서(方書)에 밝게 통()하기를 기다려서 도로 서용(敍用)하도록 허락하소서.
5. 습독(習讀)한 사람들은 매달 말께 병을 치료한 것과 약재(藥材)를 잘못 사용한 것의 많고 적음을 상고하여, 예조(禮曹)의 당상(堂上)과 전의 제조(典醫提調)·승지(承旨)가 함께 마감(磨勘)하여 계달(啓達)하고서 승진(陞進)시키거나 출척(黜陟)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조실록 세조 8년(1462) 2월 14일 -

전의감에 소속된 의서습독관은 3번으로 나뉘어 3일씩 교체하며, 내의원에 출근하였다. 습독관은 25세 이하의 사족 중에서 선발하였고, 성적이 좋으면 현관으로 임용했다. 이들은 약방문에 관한 여러 책을 살피고 공부하였으며 진료도 하였다. 이와 같은 영향으로 조선 전기에는 양반 사족 출신의 의관들이 많이 활동하였다.

사서에 현재까지 의서습독관으로 확인되는 사람은 그 첫 인물인 이효지(李孝之)를 비롯해 전순의(全循義), 임원준(任元濬), 권찬(權攢), 박맹달(朴孟達), 임제신(任悌臣), 이정회(李庭檜), 정습(鄭霫)등 총 25명이다. 이들 중 전순의의 경우 어의를 지냈으며 식료찬요(食療纂要)를 저술하기도 하였고, 임원준은 문과에 합격해 예조판서 등에 오르며 창진집(瘡疹集)을 저술하였으며 의관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권찬 역시 약방제조, 공조판서를 두루 역임하며 의학교수로 활약하며 의서유취(醫書類聚)를 지었다. 또 선조 때의 인물인 이정회의 경우 안동의 의원 운영에 참여하며 지역 유생들과 의학을 토론하고, 직접 의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의서습독관 제도는 나름의 성과를 내며 꽤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의료 관료에 대한 천시 경향은 시대가 지날수록 점점 깊어져 갔다. 세종실록 세종 27년(1445) 10월 20일에도 이와 같은 경향이 잘 드러나 있다. 세자(훗날의 문종)는 "지난번에 양가(良家)의 자제로서 나이 젊고 총민(聰敏)한 자들을 뽑아서 그 업을 익히게 하였으나, 이들이 의업(醫業)을 천하게 여기고 다투어 서로 면하기를 꾀한다"라고 하며, 이미 등과(登科)한 자 중에 이를 익히게 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낸다. 하지만 좌승지 황수신은 등과한 자들은 좋은 벼슬을 구하려 할 뿐 의업에는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심지어 성종실록 성종 14년(1483) 6월 29일에는 성종이 권찬을 공조판서에 임명하려 하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김직손(金直孫)은 "지금 권찬을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삼았는데, 육조(六曹)는 바로 옛날 육경(六卿)의 직책입니다. 그러니 오직 재주와 덕이 겸해서 높은 자라야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인데, 권찬은 원래 의술(醫術)로 지위가 재상(宰相)에 이르러 자격과 경력이 또한 얕으니, 매우 합당하지 못합니다"라고 이를 반대한다. 물론 성종은 이 반대를 물리치고 권찬을 임용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 9년(1503) 7월 10일에는 "대전속록(大典續錄)에 내의원 습독관(內醫院習讀官)으로 그 법에 정통한 자는 계청하여 좋은 벼슬에 제수한다"는 전례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습독관 출신의 서용과 출신은 늘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시대 유영정(劉永貞)의 경우 양반 출신이면서 과거도 보고 습독관으로 의학교수(醫學敎授)를 하기도 하였는데 대신들은 성종의 어서(御書) 중에 의관들의 서용은 특지(特旨)가 있으면 허가한다는 이유로 들어 그의 서용을 반대한다. 이후 연산군의 특지로 그 역시 서용되었지만 중종반정 이후 중종 2년(1507) 윤달 1월 24일 의과로 벼슬길에 나가게 하는 것은 준례가 없다는 명분을 들어 이조와 병조가 그의 관직을 바꿀 것을 청하니 그렇게 명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의학을 익힌다는 것만으로도 승진을 물론 서용에서조차 제약을 받자 사족(士族)들은 의학 관료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이후 연산 3년(1497) 공식적으로 서얼에게 의과(醫科)시험이 허용됨에 따라 점차 서얼과 중인들의 전유물이 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사족(士族)들이 의업을 천시한다고 하여 이를 완전히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주자(朱子)도 소학(小學)에서 이르길 의술(醫術)을 배우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기본 소양으로 이를 알아두어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또 당시 명나라에서 수입된 의학 이론인 '양상유여 음상부족(陽常有餘 陰常不足)'은 성리학의 수양론과 일치하는 점에서 사대부들의 의학 공부에 대한 거부감을 줄였다. 즉 '양상유여 음상부족'을 제기한 원나라 의원인 주진형(朱震亨)은 양()은 늘 모자람이 없으나 음()은 부족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음()을 아끼고 보충하라는 것이다. 이는 한의학에서의 한약 처방의 이론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의약(醫藥)에 밝은 이들은 의료관서의 제조(提調)를 맡으면서, 전문 의관과 함께 약의 조제나 치료 등에 동참(同參)하였다. 정승이 맡는 도제조(都提調)나 판서급의 제조에겐 의료지식이 필수였다. 의료관서를 감독하고, 그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것 이외에도 왕과 왕족들의 의약을 논의하고,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보기에 따라 또 다른 형태의 유의(儒醫)라고 할 수 있다.

내의원의 경우 보통 한 달에 6차례 정기 입진(入診)을 했다. 이때 도제조가 주로 먼저 문진에 참여한다. 예컨대, 승정원일기 영조 1년(1725) 8월 6일 기록에는 영조가 감기 증세를 보이자 이를 입진(入診) 하는 자리에서 좌의정 겸 도제조 민진원(閔鎭遠)은 변의 묽은 정도, 수면 상태, 배변 시 복통 여부, 입맛, 배변 후 묵직한 기운 등을 상세히 확인한다. 이와 같은 문진 절차가 끝난 후 민진원은 의관들이 진맥할 것을 청했고 윤허를 받는다.

또 의약동참(醫藥同參 혹은 議藥同參)이라 하여 사족이 의약 전문직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의약이라함은 내의원(內醫院)의 제조와 의관들이 모여서 임금이나 왕비 등의 병환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진찰 및 투약 등의 일을 의논하는 것을 말함인데 여기에 참여하는 것 혹은 참여하는 사람을 의약동참이라고 하였다. 또 의약하는 청사를 의약청(議藥廳)이라고 불렀다. 현종 때 내의원에 설립된 의약동참은 정원 12명으로 기록을 통해 196명이 확인된다. 이들 대부분은 사족 출신이며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당상관이나 당하관을 막론하고 모두 어의(御醫)라 칭했다. 의약동참의 경우 그 공로를 인정받아 포상을 받기도 하였는데 숙종 즉위년(1674) 10월 17일 대비가 아플 때 의약(議藥)에 동참하였던 창성군(昌城君) 이필(李佖), 김석주(金錫胄), 정유악(鄭維岳) 등에게 모두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고위 관료인 내의원 도제조와 제조 외에도 유학과 의학 지식이 높은 유의(儒醫)는 많았다. 이황, 유희춘, 정약용, 이문건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예컨대, 순조 30년(1830) 5월 5일 효명세자의 병세가 갑자기 위중해지자 유배에 가 있던 정약용을 의약에 동참하게 한다. 순조 34년(1834) 11월 13일에도 순조가 위급해지자 정약용을 불러들이는데 이때 그 이유에 대해 의리(醫理)에 정통하여 평소에 이름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인종 때 정렴(鄭𥖝), 선조 때 성협(成浹), 숙종과 경종 때는 이공윤(李公胤), 정조 때 이세연(李世延) 등이 유의(儒醫)로서 입진 하였거나 의약에 동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의학에 밝은 유학자들은 각종 의료서적을 내기도 하였다. 류성룡은 의학변증지남침경요결을 쓰고, 김안국은 본문온역이해방을 편찬하였다. 박영은 경험방활인신방을 저술하고, 조탁은 이양편(二養編)을 집필한다. 또 김정국은 촌가구급방을 편찬하고, 홍만선은 산림경제를 썼다. 그리고 동의보감 서에 따르면 동의보감 편찬에 유의(儒醫) 정작(鄭碏)이 함께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반이 급증한 조선 후기에는 의업을 아예 본업으로 삼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조선 백성의 건강관리와 의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유의(儒醫)는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의생면허 제도가 시행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의생으로 불리던 전통 의료인은 1951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면서 40년 만에 한의사(韓醫師) 호칭을 회복하게 된다. 이들은 전통 한의학에서 심신일원론(心身一元論)의 사상이나 장부의 기능적 이상을 구체적이고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전통적인 가치를 계승함과 더불어, 현대의학과 과학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오늘날의 현대 한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비(吏批)에게 전교하기를,
"전에 의학교수(醫學敎授)는 의술(醫術)을 아는 사람으로 제수하였다. 이 사람들이 의술을 아는가?"
하니, 회계하기를,
"이 사람들이 의술을 아는지에 대해 여부는 잘 알 수 없으나, 전부터 문사(文士)로 차임하여 의생(醫生)과 의녀(醫女) 등을 교훈하는 일을 단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전례에 따라 의망(擬望)하였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의술을 아는 사람을 택하여 올려라."
하니, 회계하기를,
"널리 물은 뒤 후일 정사에서 차출하겠습니다."
하자,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선조실록 선조 33년(1600) 7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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