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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북스

불안사회 - 저자. 한병철 -

책 표지

책소개

미래도 없고, 연대도 사라진 현시대를 향한 날카로운 통찰!
불안의 시대를 향해 역설하는 공감과 연대의 힘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고 말하는 저자 한병철은 그의 최신작 불안사회에서 이 시대의 질병을 '불안'이라 진단하며 불안이 잠식한 사회에서 끊어져 버린 연대와 만연한 혐오에 경종을 울린다. 불안을 하나의 체제로 사용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희망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저자는 책을 통해 짙은 불확실성과 깊은 무기력에 빠진 현대인의 삶에 필요한 것은 '희망'임을 강조한다. 불안에 잠식되어 미래를 그리지 못하고 과거의 트라우마에 빠져 허우적대는 삶은 그야말로 '생존의 삶' 그뿐이다. 실패에 대한 불안, 소외에 대한 불안, 도태에 대한 불안….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그저 살아남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저자인 한병철은 문제는 질병처럼 창궐하는 불안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저자는 엄습하는 정체 모를 위협감에 대화와 경청, 공감과 화해가 붕괴된 사회는 감옥과 다름없다고 일침한다.

안타깝게도 불행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저자는 "희망만이 살아남음을 넘어서는 살아있음을 되찾게 해줄 것이다. 희망은 삶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고 날개를 달 의미의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라고 전한다.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충분히 실천할 수 있는 조언을 통해 불안의 체제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우울하고 탈진한 미래를 전복시켜줄 해결책을 제시한다.

책 속으로

P.8 역자 서문 중에서

우리는 살면서 절망의 바닥에 도달할 때가 종종 있다. 다시 올라올 힘이 없을 때, '희망의 정신'이 있어야 비로소 그 절망의 바닥에서 두 눈을 뜨고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의 수고로움이 모두 흩어져 사라지고 고요해진 밑바닥에서 손으로 다시 흙을 쥐는 순간, 아무도 정복할 수 없는 나만의 '바닷가의 보헤미아'가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벨과 첼란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 존재를 가능케 하는 탄생성을 지닌 희망이 우리 시대가 추구해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P.22~23 들어가며 중에서

희망적 사유는 낙관적 사유와 다르다. 희망과 달리, 낙관주의에는 부정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낙관적 사유에는 의구심도, 절망도 없다. 완전한 긍정이 낙관주의의 본질이다. 낙관주의는 어떠한 것이 좋은 쪽으로 흘러갈 거라고 굳게 확신하는 사유 방식이다. 따라서 낙관주의자에게 시간은 닫혀 있다. 낙관주의자는 닫혀 있지 않은 미래, 가능성의 여지로서의 미래를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낙관주의자에게는 새로이 발생하는 것이 없다. 낙관주의자에게 놀라움을 안겨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 미래란 '처리 가능한 대상'이다. 그러나 실제 미래라는 시간은 '처리 불가능성' 안에 존재한다. 낙관주의자는 손에 잡히지 않는 먼 곳에는 시선을 주지 않는다. 이들은 기대하지 않은 것 또는 예측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P.30~31 들어가며 중에서

오늘날 만연한 불안은 실제로는 영구적인 재앙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조적인 이유와 연관된, 그래서 구체적인 사건에서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넓게 퍼진 불안에 괴로워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불안의 체제다. 사람들을 서로에게서 떼어 내, 각자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도록 했다. 총체적 경쟁과 늘어 가는 성과 강박은 공동체를 침식시킨다. 자기애적 고립은 외로움과 불안을 낳는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점점 불안으로 채워진다. 실패에 대한 불안,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충족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 뒤따르지 못하거나 도태될 거라는 불안. 그러나 고루 퍼진 이러한 불안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생산성을 높여 준다.

P.113~114 희망과 인식 중에서

에로스 없이는 동일함의 지옥에 갇히게 된다. 들뢰즈는 심오한 질문을 던졌다. "'친구'가 사유하기 위 한 조건이 (…) 된다면 '친구'의 의미는 무엇일까? 연인, 오히려 연인이 맞지 않는가? 그 친구가 순수 사유에서는 배제되었다고 여겼던 타자와의 생생한 관계를 다시금 사유 속으로 포함하지 않는가?" 인공지능은 친구도, 연인도 없으므로 사유할 수 없다. 인공지능에게 에로스는 없다. 인공지능에게는 타자를 향한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P.156~157 삶의 형태로서의 희망 중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는 '일상성'에 빠지거나 '존재할 수 있음에 대해 불안해'한다. 고양된 기분이나 고조된 기분은 현존재의 본질적인 측면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지닌 부담스러움의 특성을 계속해서 주장한다. 그는 희망마저도 부담스러움의 특성으로 귀속시킨다. 그러나 희망은 고양된 기분이 되어 우리에게서 실존의 부담을 덜어 내 준다. 희망은 현존재의 부담을 덜어 주거나 가볍게 해 준다. 그러한 희망에서 우리가 '내던져짐'과 '죄책'을 초월할 수 있게 해 주는 움직임과 약동이 나온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는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그런 현존재에게 은혜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희망은 은혜를 받을 줄 안다. 또한 하이데거는 희망의 시간성을 '이미 존재함의 양태'라고 잘못 해석한다. 희망은 '아직 아닌 존재의 양태'로 특징지어진다. 하이데거는 'Avenir'로서의 미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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