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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건축 여행 - 저자. 김예슬 -
책소개
서울 속 54곳의 근현대 건축물과 그 속에 담긴 시간, 사람 이야기.
『서울 건축 여행』은 10년 가까이 전국의 건축물들을 여행하며 기록을 남겨 온 건축 여행인 저자의 차분하고 심도 있는 시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그 기록 가운데 서울의 근현대 건축물들 54곳을 뽑아 정보와 감상, 역사와 인물 해설을 고루 담아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낸 결과물을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
김중업, 김수근처럼 '한국의 건축'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이름들의 작품부터 도심 속 높은 빌딩 사이에 더부살이하듯 자리 잡은 역사적 장소들, 낯선 이름과 사건들이 등장하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들까지. 지하철역, 버스 정류장, 사무실과 식당의 근처에서 못 본 채 지나쳤던 공간들이 역사적 이야기와 함께 영화처럼 눈 앞에 펼쳐진다.
지금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지도, 가까이 있지도 않은 근현대의 과거에 만들어진 건축물들은 과거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저자에게 말을 걸어왔고 저자는 책으로 독자에게 공간을 펼쳐놓는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서울을 여행하는 모두에게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주는 『서울 건축 여행』. 책을 여는 순간, 건축 여행자의 눈으로 역사와 건축과 도시와 삶을 새롭게 보는 여행이 시작된다.
책 속으로
「경교장」 중에서
어떤 시간은 멈춰 있고, 어떤 시간은 계속 매끈해지고 있다. 병원 벽에 붙어 연명하고 있는 경교장을 보며 불편했던 마음이 정동길을 걸으며 증폭된다. 덕수궁까지 걸어 나와 구 서울시청사와 신 서울시청사 사이를 서성여 본다. 서울을 흐르는 역사의 시간은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장면가옥」 중에서
손때 묻은 살림살이 덕에 장면가옥에는 더욱 생활감이 묻어난다. 이 집을 가장 사랑하던 사람은 김윤옥이 아니었을까. 자식 7명을 키우며 집안 구석 구석을 가장 많이 쓸고 닦은 사람이었을 테니 말이다. 오래 머무른 사람보다 많은 수고를 들인 사람이 공간을 더 애정하게 된다. 매일 빨래를 하고, 바닥을 닦고, 가족들이 남긴 흔적을 정돈하며 늘 하는 생각이다.
「돈의문박물관마을」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삼대가옥이다. 1956년에 지어진 집인데 보존 상태가 좋아서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고 한다. 집 안 창문 테두리, 문 손잡이와 장식 곳곳에서 곡선으로 멋을 냈다. 특히 소뿔을 연상케 하는 묵직한 손잡이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디자인이라 계속 봐도 질리지 않는다.
「심우장」 중에서
부엌에 난 유리 창문을 빼꼼 들여다본다. 심우장은 마루에도 유리문이 달려 있다. 나는 심우장 마루 위 천장을 좋아한다. 갈색 사각형 나무 틀 안에 꽃 모양이 천장을 덮고 있다. 암자처럼 규모가 작은 집이지만, 이 천장을 볼 때마다 커다란 대웅전 안에 걸려 있는 연등이 떠오른다.
「권진규 아틀리에」 중에서
흙과 불이 사라진 작업실은 낙엽이 지고 있는 초겨울 같다. 그가 직접 디자인했다는 테이블이며 의자, 사용했던 가구들은 가지가 앙상한 나무처럼 보인다. 깨끗한 바닥이지만 발을 떼는 순간마다 낙엽이 바스러지는 듯하다. 권진규는 뒷마당에 있던 큰 가마를 없애고 이 작업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1973년 5월 3일, 고려대학교 박물관 현대미술실 개막식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본 다음 날이었다. 계단에는 유서와 작품을 팔고 받은 돈 30만 원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구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청사」 중에서
그 순간 눈앞에 본관 문을 열고 키 178센티의 호리호리한 건축학도 이상이 들어오는 것만 같다. 시인 김기림이 회고록에 쓴 청년 이상은 '흰 피부에 긴 눈, 짙은 눈썹,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다녔다. 건축학과 실기실에서 찍힌 사진과 비슷한 묘사다. 김기림이 보았던 이상보다 건축학도 시절은 더 어렸으니 얼굴은 앳되고 눈에는 반항기가 조금 더 서려 있었을 것이다. 오가는 학생들과 일본어로 시끄러운 복도를 아주 무심한 표정으로 서있다가 삐그덕대는 마룻바닥 위를 큰 키로 저벅저벅 걸어갔을 이상을 그려 본다.
「건국대학교」 중에서
이 건물들을 사용하는 사람은 부자도, 고위 간부도, 개인도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고 겨우 살아남아 대학생이 된 청년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의뢰받았을 때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건축가마다 설계를 통해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김중업이 내놓은 대답은 조형적 아름다움이었다. 전후 복구 중이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단순히 예쁜 건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를 건축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닌지 짐작해 본다.
「신아기념관」 중에서
도시에서 시간은 초와 분 단위로 빠르게 흩어지는 듯하다. 1초만 늦어도 지하철 문이 닫혀 버리고, 1분만 늦게 일어나도 지각이다.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느낄 새도 없이 무수한 풍경을 지나치는 일상의 연속이다. 하지만 오래된 건물 안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건물 속 벽돌, 창문, 천장을 보며 과거를 또렷하게 느낄 때 건물 안에 있는 현재의 나도 선명해진다. 서울에서 건축 여행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길상사」 중에서
길상사에는 일반적인 절 같은 화려한 단청과 공포가 없다. 대신 한옥 별장 같은 형태로 곳곳에 아기자기한 멋이 배어 있다. 건물을 잇는 다리의 곡선이나 담장에 기와로 낸 꽃무늬 같은 부분 말이다. 원래대로 음식점으로 사용되었다면 그것도 운치가 있었겠지만, 절이라 더욱 특별한 분위기를 풍긴다. 불자와 시민들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정원 같은 절이다.